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1. 별이 여행을 시작하다. 문앞에서 자신을 맞이하는 엄마의 표정만으로도 모든 상황을 예측했다. 여느때보다 환하게 밝혀진 집안을 분주히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은 엄숙하고도 슬픔에 쌓여 있었다. '기어코 돌아가셨구나. 마지막 모습도 못뵈었는데...' 안방을 들어서며 문설주에 기댄 손가락이 자신도 모르게 떨려왔다. 방 한쪽에 정갈히 모셔져 있는 할아버지의 시신. 평생 한번밖에 입지 못할 수의가 단정히 입혀져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비록 눈을 감았으나 아직도 온기가 느껴질 듯 했다. 순식간에 시야가 흐릿해져왔다.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뜨거운 것에 참기 힘든 슬픔의 회오리. 위암으로 투병생활이 거의 육개월... 이미 다다를 수 있는 최악의 단계까지 힘들게 와버려서야 생을 마감하실 수 있었다. 그래도 살고 싶어하셨다. 무엇이 할아버지를 그토록 붙잡고 있는지 의문이 들만큼 모진 고통에도 아랑곳없이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어하셨다. 옆에서 보기가 처연할만큼 삶에 대한 애정과 집착이 강하신 분이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나마 버텨오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그 병마에의 고통은 이루말할데가 없음을, 겪지 않는 나조차도 절절하게 느끼고 있었다. 나는 장사준비에 여념이 없는 가족들 사이에서 살그머니 빠져나왔다. 깡마른 할아버지의 시신은 이미 영혼이 떠나버린 후...... 그 옆에 있고 싶지 않았다. 집 앞 놀이터 그네에 몸을 실은 채 3월 초순의 아직은 차가운 밤공기에 몸을 떨며 가볍게 발을 굴렀다. 흔들림은 슬픔따윈 아랑곳없이 예전과 변함없이 기분좋게 전해져왔다. 마치 어렸을 때 바로 이 곳에서 할아버지가 눈에 보이지도 않던 그네를 밀어줬을 때처럼....... 숨이 막힐 것 같은 안타까움에 고이는 눈물을 삼키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독할정도로 고요한 밤하늘... 오늘밤은 시간이 멈춰버릴정도로 천천히 흐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할아버지, 별이 정말 예뻐요. 그리고 굉장히 많아요." "그래. 정말 예쁘구나." "피. 거짓말, 할아버지는 보지도 못하구서.." 아이의 철없는 말에도 그네 밀던 것을 멈춘 할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할아버지도 봤단다. 할아버지도 눈이 보일때가 있었지.. 그 때 본 밤하늘의 별도 정말 예쁘고 몹시도 반짝거렸었단다." "그 때 별이랑 지금 별이랑 똑같아요? 지금 이렇게 멋진데. 그 때는 안그랬을거야." "별은 여행을 떠났다가도 결국 자기 자리에 돌아오지. 우리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말이야. 네가 보고 있는 별들도 아마 할아버지가 예전에 봤던 그 별들일거다. 그러니까 예쁜것도 반짝거리는 것도 변함이 없을거야." "정말 별들이 여행을 떠나요? 우리처럼?" "어떤 별들은 평생을 자기 자리를 지키고만 살지, 그렇지만 어떤 별들은 여행을 떠났다가 정해진 시간 후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단다. 그것이 그 별의 정해진 길이지." "정해진 길이요?" "그 별의 운명이라고나 할까." "운명? 그게 뭔데요." 천진스럽게 되묻는 아이의 그네가 흔들림을 어느새 멈추었다. 질문이 상당히 어려웠던 모양이듯 할아버지의 대답이 곧장 들리지 않았기에 아이는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고요히 감긴 두 눈이 무엇엔가 머물러 있는 듯, 단정히 다물어진 입은 좀처럼 떨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할아버지?" "...... 운명이란 말이다. 떠나는 별과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별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는 힘과도 같은 것이란다. 그렇지만 멀리서 스치기만 할 뿐 닿지는 않아. 닿아서도 안되고. 그래서 더 안타깝고 슬픈게 운명이야.“ "슬픈거?" "그래. " 어느새 할아버지의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따뜻했지만 아이는 느끼고 있었다. 그 운명이란 것이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엄마한테 눈물이 날만큼 혼나는 것보다 더 아프고 슬픈 것이란 걸. 그래서 할아버지가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한번도 열린 적 없는 할아버지의 두 눈에 담긴 슬픔이 아이의 마음에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더할 나위없이 소중한 사람이었다. 나의 인생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영향력을 미친 사람을 꼽으라면 다름아닌 할아버지였다. 일로 바쁜 부모님 대신에 나를 기른 사람도 젊은 나이에 홀로 되셨다 하는 할아버지였으며 내가 모르는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사람도 할아버지였다. 나는 할아버지를 표현할때 '현명한'' 자상한'' 이해심이 많은''완벽한' 등의 형용사를 붙였다. 그만큼 어려서부터 봐온 할아버지는 어디 흠잡을 곳 하나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어른이었다.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등 모르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박식했으며 한국전쟁때 미군부대에 계셨다는데, 고등학생인 나보다 영어와 일어를 잘하셨다. 눈이 안보이시는 시각장애인이었지만 눈이 보이는 어른들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시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할아버지는 나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아끼셨고 나도 그를 몹시 사랑했다. 그런 그를 잃게 된 지금의 상황이 도저히 현실감있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았기에 나는 눈물조차 펑펑 쏟지 못하고 있었다. 실컷 울어버리게 되면 그것으로 남겨진 자로서의 역할을 다했다는 듯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 할아버지를 잊게 될 것 같았다. "그런 건 견딜 수 없어..... 할아버지.... 할아버지..." 세상의 모든 슬픔이 나에게 스며들었다. 날카로운 칼날도 없는 그것은 할아버지를 해친 암세포만큼 고통스럽게 심장을 갈라내고 있었다. "지금, 할아버지의 영혼은 어디에 있어요? 어디에 맴돌고 있어요? " "아직 떠나지 않았다면 경서 보구가요... 나 보구가요... 할아버지......." "............ 나.. 이대로 못견딘단 말이에요. 평생을 .. 평생을.. 어떻게 할아버지 없이...." 울면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어깨가 자신도 모르게 들썩이고 있었다. 나의 들썩임에 그네 체인도 작은 소리로 카랑거리며 흔들렸다. "돌아오세요.. 할아버지.... 제발... 흑흑..." '경서...........' 깜짝놀라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누구지? 누가 날 불렀지?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밤 늦은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은 걸까? 분명 어떤 남자의 목소리였는데...‘ '경서...........' 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분명 허공에서 들려왔다. "누, 누구에요. 누가 날 불렀어요?" '경서.... 돌아와....' 정말이지 간절한 목소리가 명확하게 귀에 들린다고 생각한 순간 발 밑에 작은 회오리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뭐, 뭐얏!" 놀라서 얼른 발을 들었지만 회오리는 무서운 속도로 내 몸을 타고 올라와 나를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2. 또다른 별을 경유하여. '반드시 기다릴게.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너만 기다릴거야.' '... 바보같이... 다시 만나도 사랑따윈 못해.' '그래도 기다릴 수 밖에 없어... 네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그건 그건 내 운명이니까..' '........... 운명같은 건.....' 바보같이 운명따위에 자신을 맡겨버리다니.... '........ 운명같은 건 슬픈거야....' "에구머니나~!!! 눈물을 흘리네!" 쿵쾅거리며 소란스럽게 누군가 나가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도대체 무슨일일까... 방금 전에 떠오르던 목소리는 누구의 것이었지? 그러나 굉장히 그리운 듯한 음성... 왜 눈물이 계속 흐르고 있는 걸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다. 뺨에 와닿는 공기가 퍽이나 포근했다. 포근해? 밤공기가 그렇게 찼는데... 여기는 어디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밤에 새라니... 문이 열려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새는 울고 공기는 따스하다... 뭔가 미묘하게 어긋나는 듯한 일들에 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온 힘과 신경을 눈에 집중하여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려 애썼다. 처음엔 마치 가위에 눌렸을 때 움직여지지 않듯 꿈쩍도 않던 눈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을때 나는 그만 극심한 공포에 질리고 말았다.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은 무한의 암흑뿐. '보이질.. 않아... 눈이 보이질 않아...' 그 어떤 빛줄기도. 아니 어슴프레한 빛의 그림자도 드리워지지 않는다. 순수한 먹의 색깔이 온통 눈 앞을 채워버렸다. "정말 눈을 떴잖아? 이봐. 정신이 들어? 사흘만에 깨어난 거라구" 누군가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유창하지만 어딘가 어색함이 있는 말.. "이봐, 이봐. 괜찮은거야?" 억센 팔이 몸을 흔드는 게 느껴졌다... "..... 보..." "뭐라고?" 거칠게 갈라진 음성이 가늘게 흘러나가자 곧이어 말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보이지가 않아요.. 눈이 보이지가 않아요..." "...뭐?!" 나의 시력은 모두 눈물로 녹아 흘러버린 모양이라고. 그래서 멈출수가 없었나보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다시한번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은 얼마나 시간이 흘러서인지 모르겠다. 힘들게 눈을 떴지만 여전히 보이는 건 암흑뿐. 나는 심장까지 달달 떨리는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할아버지의 죽음. 나의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범상치 않은 회오리 바람... 그리고 지금....나는 실명해버렸다. 인생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 간다고 생각해 온 나였지만 며칠 간 일어난 일은 그것으로 설명하기엔 너무나도 부족했다. 어떤 것이 제대로 흘러가는 것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 정말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엄마는 어디있지? 여기가 어딜까? ' 내옆에서 경망스럽게 소리를 지르던 여자의 목소리와 나의 안위를 묻던 남자의 목소리가 떠오르면서 말할 수없이 불안해졌다. 내가 기절해 있어서 누가 구해준걸까? 그나마 다행인건 내가 제대로 내가 누구인지, 집이 어디인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력을 잃는 게 아니라 무슨 삼류드라마처럼 기억상실에라도 걸렸다면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 남자에게 부탁해서 집에 연락해야겠어.. 눈이 안보이는 것도 일시적인 현상일거야. 병원가면 괜찮아질거야..' 애써 두려운 마음을 누르며 주위에 누군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림은 오래지 않았다. 나는 계속 여러 사람들에게 보살핌을 받고 있었던 듯 내가 눈을 뜨고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이 금세 알아차렸다. 곧이어 나를 흔들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나? 이제 그만 좀 기절하라구." 나는 나를 일으켜 달라는 시늉으로 팔을 들어보였다. 그는 알아들은 듯 나를 부축해 벽에 기대게 해주었다. 일어나 앉자 몸이 한결 가벼운 기분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누워있었던 기분이었다. 엄마가 걱정하고 있을거야.. ".... 여기가 어디죠?" 보이지도 않는 눈을 하고 남자를 향해 물었다. "여기는 이케지마 가(家)다. 네가 동산에 기절해있는 것을 내가 발견해서 데리고 왔지." "..이케지마?" 이케지마라니... 재일교포라도 되는 건가? 아님 혹시 내가 지금 일본에 와있나? 그럴리가.. 이 사람은 우리 말을 정말 잘하는데.. "여기가 일본은 아니겠죠?" "일본의 한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네가 말한 의도를 생각해볼 때 아니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군." ".......?" "조선이라 말이다. 너 정말 모르고 묻는 건 아니겠지?" "조선?" 조선이라는 이름을 요즘 쓰는 사람도 있나? 나는 당황스러워졌다.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상황이 연속되면 곤란하다.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여기가 서울이 맞긴 해요?" "서울? 아직 경성을 그렇게 부른다고는 못들어봤지만?" 숨을 들이마셨다. 눈이 안보인다는 것이 이토록 상황을 더욱 두렵게 만드는 것인지 몰랐다. 할 수만 있다면 말하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이 집을 확인하고 뛰쳐나가 거리를 확인하고 싶었다. 나를 어둠속에 가두어 놓은 그 어떤 두려운 존재가 또다른 무엇인가로 농락하려 드는 것인지. "장난이시라면 제발 그만둬주세요. 저 눈이 안보이게 돼서 너무너무 두려워요." "..... 뭐가 장난이라는 거냐..." 내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의아함을 품은 그의 진지한 대꾸에 할말을 잃은 건 내쪽이었다. 이 사람... 거짓말 하고 있는 것이 아냐. "너야말로 누구냐? 왜 동산에 쓰러져 있었지? 조선인일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옷차림이 특이해서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대꾸할 수가 없었다. 내가 누구라고 말하면 당신이 납득할 수 있겠어? 절벽에 내몰린 상황이 아니라 이미 절벽 밑 깊은 심연으로 추락한 기분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감당할 수 없는 일들만 닥쳐 오고 있었다. 무엇이 이런 일들을 불러오는 것일까... 나의 운명에 이런 일들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까.. 이렇게 견뎌내기 어려운? "...갈 곳이 없다면 여기서 지내도 좋아... 내가 보기엔 어떤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대꾸없이 눈물만을 흘리고 있자 그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음성 속에 느껴지는 친절과 따스함이 더욱 눈물이 흐르게 만들었다. 그나마 이렇게 친절한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구나... "고맙습니다." 나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진심을 다해 대답했다. 비록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얼굴조차 알수는 없었지만 그의 친절과 마음만이 의지할 수있는 단하나의 것이었다. 3. 여행의 새로운 동반자 "경서, 왜 벌써 일어났지? " 문가에 기대어 앉아 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따라 아침공기가 서늘한데 뭐 좀 걸치지 그래?" "옷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 어느새 등 위로 따스한 옷의 감촉과 함께 내 옆에 그가 걸터앉는게 느껴졌다. "가을이 빨리도 지나가는군... 금세 추워지겠어." "응..." 나는 이미 이번해의 가을은 보내버렸는데 이곳에 와서 다시 가을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도 계절은 변함없이 반복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수십년후의 봄여름가을겨울을 지낸 사람...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조선 경성에 오게 된지 거의 세달 가까이 지났다.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떻게든 살아지고 적응하는 게 인간인 모양인지 나는 평온하게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너무나 아무 일없이 흘러가서 나를 이곳까지 인도한 그 무엇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뭔지 도저히 알수없게 되어버릴 만큼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정말 이대로 시간이 흘러서 이렇게 평생 살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식으로만 끝나지 않을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반드시 돌아가게 될거야... 모든 별은 여행을 끝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것이 운명이야... 나를 구해주고 낯선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집안의 한사람으로 받아들여줬던 그는 예상대로 일본인이었다. 나이는 23살, 도쿄 제국대 경제학부에 다니다 휴학한 상태로 지금은 집안의 일때문에 조선에 와있는 것이라 한다.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전혀 예측할 수는 없었지만 여자 하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어보아 굉장히 수려한 미남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말소리가 들리는 높이를 보아 키도 나보다 훨씬 크다... 가끔 그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일본인이면서 수상하기 짝이없는 나를 어떻게 성큼 집안에 들여놓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토록 친절을 베풀 수 있는건지... 아직도 나에 대해 자세히 모르면서.... 그의 보살핌 아래 나는 눈이 안보이면서도 안전하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하인들은 나를 도련님이라 부르며 극진하게 대했고 그것은 그의 영향이기도 했다. 그는 처음의 만남 이후로 나의 신변에 대해 묻는 법이 없었다. 다만 그가 아는 것은 내 이름이 민경서라는 것과 나이가 18세라는 것 정도... 그러나 그는 마치 더 알고 싶은건 없는듯 나를 대했고 자세히 설명할 길이 막막했던 나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그런 것 필요없이도 그는 충분히 세심하게 나를 배려하고 있었다. "요즘 많이 바쁜 것 같아..." "응, 숙부의 사업이 복잡해져서..." 자세히 말은 안하지만 그가 돕고 있는 숙부라는 사람이 굉장히 거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케지마 가문이 얼마나 이름있고 위력있는 집안인지도... 내가 고개를 내미는 일은 전혀 없지만 집에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는 손님들과 접대에 분주한 하인들의 수군거림으로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단지 내가 걱정되는 것은 그의 사업이 나의 민족에게 어떤 해악을 미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쟁이 점점 어렵게 되가고 있는 것 같아. 일본 본토가 위험해질 것 같은데 숙부는 자꾸 사업을 확장하고만 있지. 그는 이 전쟁을 이용할 수있는데까지 이용하려고 해" 그의 말투에 약간의 경멸이 담겨 있었다. 그는 숙부의 실질적인 힘이 되어주고 있었지만 그의 일을 달갑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아보였다. "응.. 그래..." 나도 어느 정도 걱정을 하고 있었다. 비록 일본인이지만 나를 구해준 은인인만큼 그가 잘못되는 것을 바라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1944년...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전쟁은 곧 끝난다. 당신 나라는 패배할거야. '흠칫' 그의 손이 어느새 내 어깨에 올려져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이후로 누군가 내 몸에 손에 대는 것을 매우 겁내게 되었다. 내가 몸을 사리자 그가 웃었다. "안잡아먹으니까 걱정말라고. 나인데도 안심이 안돼?" "이케지마, 그게 아니라.." "이케지마가 뭐야.... 세이지라고 부르라니까." ".....세이지...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 내가 위험한 인물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구." 침묵이 잠시 흘렀다. 이럴때가 가장 싫다. 상대방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으니까. "글쎄... 왜 잘해주는 걸까... 그래서 싫어?" "아니... 나는 정말 고마워..." "그럼 됐어." 결국 그렇다할 자세한 이유는 대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세이지의 온화하고 인정많은 성품이 한낱 조센징으로 비춰질 나를 보살피고 있는 것이라고... 일본인이라고 다 나쁜 건 아냐... 결국 심장이 있는 같은 인간일뿐. "세달 동안 집에만 있었는데 갑갑하지 않아?" "갑갑은 무슨... 정원도 가끔 산책하는데... 나에겐 여기나 밖이나 다를게 없어." 잠시 정적이 도는 걸로 보아 그가 실명이 된 나의 눈을 안쓰러워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내가 오후에 밖에 데리고 나가줄게. 바깥바람은 또 다른 법이야." ".... 응." "그렇게 너무 기뻐하는 얼굴 하지마라. 그동안 방안에만 가둔게 미안해지잖아. " "앗.. 어.." 집안이 갑갑하지 않다고 말은 했어도 사실 나는 옛서울의 공기를 느껴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바깥세상을 걸어보고 싶었고 나에겐 예전에 죽었어야 할 사람들이 거리를 활기차게 걷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이제서야 헤아린 듯 미안하게 말을 꺼내는 그에게 약간은 가졌던 그전까지의 섭섭한 마음을 순식간에 날려버릴 수 있었다. 하인들이 세이지가 가끔 너무나도 냉정하다고 말하는걸 들었지만 나로선 역시 좋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나의 기분을 살펴주고 낯선 세상과 통로를 만들어주는 사람은 지금 그 뿐이다. 그가 차를 태우겠다는 걸 나는 부득불 걷겠다고 우겼다. 그의 신세를 져야만 했지만 차안에 가만히 앉아있는 건 앞이 보이지 않는 나로서는 집안에 앉아 있는 것과 다를바가 없었다. 나는 걸어보고 싶었다. 사람들 속에 섞여보고 싶었다. "고집하고는..." 작게 툴툴 거리면서도 날 부축하면서 걷는 세이지에게 약간 미안함이 들었지만 처음 바깥에 나서본다는 설레임에 가슴이 뛰었다. "나에게 설명해줘. 여기는 어떤 거리야?" "아직, 주택가야. 여긴 일본인 주택이많거든.." 그의 말대로 또각또각거리는 게다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인력거로 생각되는 바퀴구르는 소리... 가끔 들려오는 차의 엔진소리.. 여자들의 말소리... 간간히 들려오는 일본어... 정말....조선이구나... 1944년이구나... 내가 여기 와있는 거구나.. 새삼 느껴지는 사실이 견딜수없는 감정으로 북받쳐올라왔다. "괜찮아?" " 응... 그냥 감정이 좀 센치해졌어.." 애써 밝은 표정으로 대꾸한 나는 좀더 밝은 목소리를 내었다. "사람들 향기가 나.. 나 더 맡아보고 싶어.. 좀 더 번화한 곳으로 가자..." "걸어서는 못가는데 아무래도 차를 타고 가야겠다." 결국 집까지 돌아가 차를 꺼내온 우리는 내 바램대로 번화가로 향했다. 주택의 고요함을 벗어나 도시의 소음이 점점 더 커질수록 나는 흥분되었다. "그렇게 좋아?" "응" 입이 종시 헤벌쭉해져있던 내가 신기한 듯 케이지가 물었다. "정말 죄지은 기분인걸... 그렇지만 모두 네 안전을 생각한 거니까 너무 서운해는 말라고.." "내 안전?" "........조선 사람들은 이케지마를 좋아하지 않아." 입을 다물어버렸다. 확실히 요즘은 시기가 좋지 않다. 어쩌면 그는 차츰 경성생활을 정리해야 할지도 모른다. "내리자.... 소원대로 사람들 틈에 섞여보는 거야." 그에게 몸을 기대어 경성의 길을 걸었다. 간간히 스치는 다른 사람의 몸... 결코 만나질 수없었던 사람들의 몸. 사람들의 유쾌한 말소리가, 여학생들의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차의 엔진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어때. 기분이? 오랜만에 나와본 건데.. 여전하지?" 여전하지...라니..... 여전한지 안한지는 난 알 수 없어... 그래도 감동적이긴 하다.... 한참을 걷다가 내가 피곤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는 나를 조용한 찻집으로 인도했다. 특이한 느낌의 음질을 가진 축음기 노랫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차를 마셨다. 간헐적인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나의 마음도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네가 좋아하는 걸 보니 가끔 나오는 것도 좋을 것 같군.." "오늘 너무 고마워. 바쁠텐데.. 나 챙기면서 돌아다니기 피곤하지?" "너라면 평생 챙기고 싶은데.." ".....?" "너.. 그런 표정 지으면 상당히 귀여운 거 알아?" "귀여워?" "그래." "다 큰 사내녀석을 귀엽다고 하다니 닭살이다." "닭살? " "닭살처럼 살이 오돌오돌 돋는다고.." 무슨 뜻인지 금방 이해한 듯 세이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재미있을 것도 없는데 왜 웃고 그래?" "네가 말하면 재미있는 걸.. 너 평소에 이상한 식으로 말 많이 하잖아." "우리 동네에선 하나도 안이상한 말이야." "그 동네 나도 좀 가보자" .... 나도 못가고 있는 걸.... 내 낯빛이 어두워지자 세이지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조용히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집에 대한 그리움이 다시 한번 밀려왔다. 이런.. 모처럼 세이지가 나를 데리고 나와줬는데 이런 표정 지어선 안돼.. "언젠가 같이 한번 갈수 있음 정말 좋겠네. 구경시켜주고 싶은게 정말 많은데.." 애써 웃으며 말했지만 세이지는 곧장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도 볼 수 없는 터라 무색해진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차만 홀짝였다. "네가... 너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좋아... 난 아무런 상관 없으니까.." ".............." "다만 네가 지금처럼 내 옆에만 있으면 돼..." ".............. 세이지" 그 말이 어떤 의미이든 그것은 마치 고백처럼 들려왔다. "고마워.." 볼 수는 없지만 고개를 들어 진심으로 말했다. 정말이지 진심으로... "이케지마. 여기서 보게 되다니 정말 뜻밖이군." "너희들이 여긴 어떻게..." 누군가의 말소리와 함께 세이지의 놀란 음성이 들렸다. "본토에 미군기가 폭격을 하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돌아와야하지 않겠어? 이국땅에서 장사치를 생각은 없다구." "음.. 결국..." "한혁도 돌아와 있어. 연락 안했어?" "한혁이?" 세이지의 목소리에 단박에 반가움이 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약간의 질투와 궁금증이 생겨났다. 누구길래 세이지가 이렇게 기뻐하는걸까. "조만간 연락하겠지. 그 집 어르신들도 꽤나 굉장하잖아? 집에도 인사드려야 하고 그 녀석도 며칠간은 바빴을거야. 근데..." 나는 목을 움츠렸다. 관찰당하고 있는 느낌에 나는 상대가 보이지도 않는데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불쾌함 반, 낯설음 반으로 얼굴까지 발그레 열이 올랐다. "굉장한 미인인걸. 소개시켜주지 않는거야?" "아..... 이쪽은" 고개가 점점 더 수그러들었다. 자리가 불편해져서 속까지 거북해져왔다. 위가 옥죄어오는 것이 마구 토해버리고 싶다. ".......이쪽은... 내 사촌동생인데 건강이 안좋아서 학교를 쉬고 잠시 나에게 와있어." 나는 화들짝 놀래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을 맞출래야 맞출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당황해서 다시 고개를 숙여버렸지만 얼굴은 더욱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그래? 이런 사촌이 있었다니 처음 알았는걸.. 그나저나 대단하군.. 이케지마의 피는 미인들만 낳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희는 이케지마의 대학친구들입니다. 제 이름은 김규현이라고 하고 이쪽은 성재명이라고 합니다." 정말 당황해버렸다. 그들은 나에게 일본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이지.. 왜 나를 일본인 사촌이라고 해가지고. 나는 제2외국어도 독일어라고. 차라리 독일말을 해줘...!! "아... 네.." 이름 소개하는 거 같길래 모기만한 목소리로나마 대꾸를 했는데 이상하게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그걸 깬 것은 세이지의 친구 중 한명이었다. "핫핫.. 얼떨결에 미인 손 한번 잡아보려고 했는데 허락하시지 않는군. 네네.. 악수는 접어두죠." 이건 확실한 조선말. 다시 한번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인사를 하면서 나에게 악수를 청한 것이었다. 나는 그걸 알아차릴리 만무했고... "그는 앞이 보이질 않아.." 세이지의 낮은 음성이 들렸다. 다시 적막한 틈... 정말 싫다. 이런 어색한 상황.. 원래부터 눈이 안보이던게 아니었어. 내가 동정받는 기분을 갖게 하지 말라고. "제가 실례했군요. 너무 언찮게 생각치는 말아주세요." "..아..네...." 좀 어려운 말했다 싶으면.. 모두 ' 아..네..' "당신, 혹시 조선인이 아닌가요?" 아까부터 약간 무례한 태도로 말을 하던 성재명이란 사람이 대뜸 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세이지가 일부러 자기 사촌이라고까지 소개해주었는데. "왜 그래. 재명? 난 조선인을 좋아하지만 내 사촌은 확실한 일본인이라네. 다만 조선에 오래 살아서 조선말이 아주 익숙하다네." "어쩐지 일본어보다 조선어를 더 능숙하게 알아듣는 거 같은데? " 상당히 의심쩍어 하는 목소리가 연이어서 일본어로 길게 또 뭐라고 내뱉었다. 나한테 하는 이야기인가? 못알아듣는 나는 다시 또 멀뚱멀뚱. "재명. 무례하게 굴지 말아. 이케지마에게도 실례네.“ 점잖은 듯한 김규현의 목소리가 질책하듯 들렸다. "이케지마. 기분 나쁜가? 내가 자네의 사촌을 시험하려고 들어서?" "........평소 장난기 많은 자네의 농으로 알겠네." 처음과 달리 세이지의 목소리가 불편한 기색이 완연했다. 도대체 뭐라고 그런거지? 나를 시험해본건가? "너무 언찮아하지 말게. 내가 여기와서 이상한 소문을 들어서 말야. 사촌이 해를 안입도록 자네가 잘 살펴야겠네." 사과하는 말 치고는 꽤나 건방진 투였지만 세이지는 대꾸가 없었다. "그럼 우리도 바빠서 이만 실례해야겠네." "아니, 재명, 그렇게 무례하게..." 말리는 김규현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둘은 자리를 떠버렸다. 나로서는 불편하던 마음이 금세 활짝 개는 심정이었다. "저 친구들 친해?" "............돌아가자." 세이지의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듯 하여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오늘 실수해서 세이지를 곤란하게 만든건가? 모처럼 나들이인데 웬지 나까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4. 목련꽃 향기 겨울 바람은 시간을 거스를수록 그 온도가 더 낮아지는 걸까?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이후로 나는 온몸으로 느낀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특히 이런 바람은 그 흔적이 보이는 때보다 보이지 않는 쪽이 훨씬 차갑다. 그런데도 나는 정원에 나와 그 칼날속에 자신을 밀어넣고 있다. 방안의 따뜻함보다 이 차가움이 더 좋은 까닭은 나를 이곳에 데려온 향기가 매서울정도로 차가운 바람 속에서 느껴졌기 때문이랄까. 어떤 때라도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을 버린 적이 없었고 그것은 아련한 향수로 남아 공기에 실려 떠돌며 나를 끌어들였다. 그래서 세이지의 나무람에도 불구하고 자꾸 이렇게 밖으로 나오게 된다. 아마 이렇게 고요한 밤은 하늘 위에도 가슴이 벅차 오를만큼 환상적인 빛들을 뿌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 집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며 바라보던 하늘처럼. 다시 한번 그 하늘을 바라보고 싶지만 시간을 옮겨도 변함없을 그 별들을 지금은 바라볼 수조차 없다. 그러나 내 머리위에 쏟아져 내리고 있을 빛들은 분명하겠지. 익숙해진 정원의 목련나무에 살며시 기대어 섰다. 이 추운 날씨에 목련은 그 향내를 슬며시 드러낸다. 며칠간 겨울답지 않게 따스했던 날들이 결코 피어나서는 안될 꽃망울들을 잠에서 깨게 만든 것이다. " 너희들 그러다 얼어죽어... 너희들이 있어야 할 시간은 지금이 아닌데.. "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나무기둥을 안타깝게 쓸었다. "....흑....... " 또 눈물이다.. 반드시 돌아가게 될거라는 희망을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혼자만 있게 되면 감상적이게 된다. 어떻게 시력은 잃으면서 눈물은 줄줄 잘만 나올까. 차라리 눈물조차 말라버렸으면 한없이 웃어버리기라도 해볼텐데.. " 목련나무야... 내가 슬프지 않게 좀만 기다렸다가 따뜻한 봄이 되면 꽃을 피울래...? 겨울의 장난에 속지마... " 간절한 마음으로 나무에게 속삭였다. 봄에 꽃을 피우면 내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손 등위에 차가운 무언가가 내려 앉기 시작했다. ' 눈이 오는 건가... ' 뺨에도 사뿐히 와닿는 눈송이들... 소리없이 펑펑 덮어오기 시작한다. ' 바스락 ' " 누구에요?!!" 뜻하지 않은 인기척에 놀라서 뒤를 돌았다.. 누굴까... " 세이지? " 묻고는 있었지만 아니라고 느껴졌다. 그가 다가오는 느낌은 이것과 다르다. " 네가 예의 그 사촌이군.. " " ....... ? " 멍해져서 대책없이 입만 벌리고 서있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다. 게다가 초면에 아주 건방지고 예절이라곤 깡그리 무시한... 약간은.... 경멸조의 ...... 미간이 찡그려졌다. 이 뒷채는 세이지가 나를 위해 특별히 마련해 준 공간이다. 지금껏 세이지와 수발을 들어주는 하인들을 제외하곤 외부인은 들어와 본적이 없는 나만의 안식처인 셈이다. 함부로 쳐들어와서 그런식으로 내뱉다니... " 누구십니까? " 정중하게 그리고 차갑게 딱 잘라 말을 했다. 아마 얼굴도 한없이 싫다는 표정이겠지. " ..... 훗.... 방금전까지 훌쩍이고 있었으면서 그런식의 차가운 표정, 어울리지 않는다구." 평소라면 듣기 좋다고 생각했을 타입의 목소리가 비웃음을 담고 울려퍼지자 내 얼굴은 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관찰당하는 것은 딱 질색이다. 게다가 조롱조라니.. " ..... 이케지마의 손님이라면 잘못 들어오신 것 같습니다. 안채는 다른 방향입니다만." " 쿡쿡.. 날이 서 있군...언찮게 했다면 미안하지만 그 쪽도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라서 말야.. " " 당신에게 거슬릴 만한 행동도 한 적이 없거니와 그렇다해도 저와는 상관 없는 일입니다. " 말려들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말대답이 나왔다. 흥분해서는 오히려 손해인데.. 저 사람 계속 건드리고 싶어하는 거 같잖아... 자리를 피하는게 상책인 것 같아 방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소에는 자칫 발이라도 헛디딜까 천천히 걷는 편이었지만 그런 모습 보이는 것조차 싫어서 일부러 걸음을 빨리했다. 어쩔 수 없이 그를 지나쳐야만 하는 상황에 온 신경이 곤두서버렸다. 심장까지 거북한 기분. 그런데 그의 존재가 가까이에서 느껴질 때 생각지도 못한 묘한 향내가 맡아졌다. 용케 실수없이 방안으로 올라서서 문을 닫으려는데 그의 목소리가 불분명하게 들려왔다. " ........ 니혼진보다 못한...." 도대체 저 사람은 누구길래 저런 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인지. 방금 일어난 작은 말싸움에 금세 흥분해 버린 자신이 참 꼴사납기도 했지만 갑작스레 나타난 정체불명의 남자에 대한 궁금증도 컸다. " 한혁~!! 한혁이지? " 반가움이 잔뜩 실린 세이지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온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문가로 몸을 기울였다. 저 사람이 그럼 세이지의 친구 한혁이란 말인가? 세이지가 꽤 좋아하던 것 같은데... " 변함이 없군. 돌아왔다는 소식은 듣었는데 연락이 없어서 섭섭해하고 있던 참이라구. " " 내가 이케지마가 이토록 반가워할 정도의 사람인줄 몰랐군. 알았으면 오자마자 여기부터 오는건데. " 역시 뒤틀린 듯한 웃음이 담긴 목소리가 나에게와는 다른 타입의 친근함과 반가움을 표시하며 울렸다. " 말은 그렇게 해도 그런 사람이 한밤에 쳐들어오기야? 사실 내가 보고싶어 견딜수 없었던 거 아닌가? " " 자네가 뭐가 이쁘다고.. 자네가 숨겨 놓은 어여쁜 목련꽃이라면 몰라도... " " ..... ?" 톤이 높아지는 한혁의 목소리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무래도 저 사람은 정말 친해지기 어렵겠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맴도는 것이... " 날씨가 추우니 어서 들어가세. 자 이쪽으로... " 나는 화들짝 놀라 문 옆으로 물러섰다. 손님이 들어오니 앉아 있을 수도 없고 뻔한 눈속임으로 자고 있는 척할 수도 없고 안절부절 문가에서 서성이자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최대한 공손하게, 사실 그와 다시 대면하게 되자 너무 무안해서 고개는 물론 허리까지 단정히 수그리고 맞이했다. " 아, 유에... 불이 켜져 있길래 아직 안자고 있는 것 같아서..소개해 줄 사람이 있는데 괜찮지? " " 네.. 우선 앉으세요. " 앉으라는 손짓을 하고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나자 나도 다소곳이 앉았다. 최대한 벽쪽으로 등을 맞대고.. " 이쪽은 내 대학친구 최한혁이야. 이름대로 조선인이고 대학에서도 인정하는 굉장한 수재야.." " 설마 자네만할까... 교수들마저도 자네를 맡는 것은 기피하지 않나." " 글쎄, 내앞에서는 그런 말 안하던걸? 자, 아직 소개가 안 끝났네.. 이쪽은 내 사촌인 유에.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우리집에 와있어." 유에는 그가 붙여준 일본 이름이었다. 여자이름같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어렸을 적 죽은 남동생의 애칭이었다고 덧붙였을땐 그냥 고개를 끄덕여버렸었다. 그의 말대로 공식적으로 나는 부모를 잃은 그의 이종사촌이었다. 이케지마의 가계가 꽤나 방대한 탓에 즉, 그의 할아버지가 남모르게 뿌려놓은 자식들의 아이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이런 불필요하게 여겨지는 위장들은 모두 그가 나를 배려한 것이었다. 그는 내가 조선인이기 떄문에 일본인에게서 겪을 수도 있는 어려움과 곤람함을 없애주고자 했다. " 훗. " 다소 오만하게 느껴지는 비웃음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저 사람은 늘 저런 식으로 웃는 걸까? " 우리말에 눈가리고 아웅이란 말이 있지. 자네만 모르고 남들은 다 아는 이야기가 있어. " " ....?" " 그 내용인즉슨 이케지마 가의 실질적인 후계자 이케지마 세이지에게는 뒷채에 숨겨놓은 정부 하나가 있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지금 헛소리를 들은건가? 누가 정부라고? " 눈이 멀었으나 그 아름다움이 꽤나 요사스러워서 당대의 실력자인 냉혈남아 이케지마 세이지를 단숨에 녹여버렸다." " .... 그만하게 " 처음의 반가웠던 기색은 어디로 가고 낮게 깔리는 경고의 저음이 지극히 단호하게 울렸다. 무릎꿇은 다리위로 단정히 포개놓았던 나의 손은 어느새 벌벌 떨렸지만 이해할 수 없는 중상모략에 해명할 방법도 몰라 멍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 한혁. 자네의 냉철한 이성과 강직한 성격을 늘 좋아해왔어. 그렇지만 세간의 떠도는 소문을 듣고 계속하여 그에게 모욕을 준다면 자네라도 참지 않겠다." 그 음성에 실린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오싹함이 나의 등줄기까지도 훑고 지나갔다. 그가 상당히 분노를 절제하고 있음을 누구라도 눈치챌수 있었을 것이다. " 글쎄 완전히 믿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 생각되는군. " " ................... " 무엇을 사실이라고 생각하는지 알길은 없었으나 방안의 공기는 밖에 비할데없이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웬지 이사람. 앞으로도 거북할 것 같다. 예전에도 지금도 나는 직선적인 사람은 싫다. " ....... 실례의 말씀입니다만 ....... " 흠칫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러나 문제의 원흉인것 같은 내가 짚고 넘어가는게 훨씬 현명한 일이겠지. " 사람들이 오해한 것 같습니다. 제가 곤란한 상황에 있었던 터라 인정많은 이케지마상이 도움을 준 것 뿐입니다. 친구분께서는 상황을 헤아리고 오해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공손하게 이야기했다. 몇개월을 일본인들과 있다보니 그 속내가 어떻든 깍듯한 예의바름은 배워버린 것 같다. 이렇게 재수없어 보이는 사람한테 몸까지 수그리다니. 한 십초쯤 지났을까? 침묵속에선 길다고 여겨지는 그 시간이 흐른 후에 정적을 깨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 후후... 세이지 자네야말로 오해말게. 세간의 소문이 뭐라고 수군거리든 내가 상관할바가 아니지 않는가. 그나저나 소문대로.. 아, 아니 정말 미인인 사촌이군." 이사람 굉장한 철면피가 아닌가하고 순간 생각했다. 방안의 차가운 공기를 아랑곳하지 않는 저 웃음과 목소리... 세이지는 저런 사람의 어디가 좋다는 거지. " ... 됐네. 어차피 진짜 사촌도 아니란 걸 알면서 그런식으로 말할필요 없어. 그렇지만 소문은 더더욱 진실이 아니니 예의를 갖고 대해주길 바래. " 어느새 세이지의 목소리가 다소 풀려있었다. " 그나저나 어른들은 안녕하신가? 가을에 한번뵙고 못뵌것 같은데. " " 하! 자네가 그 얼굴을 친히 우리집 어른들께 보였단 말인가? 대단히 황송들하셨겠군. " " 자네는 아직도 부모님과 사이가 안좋은가보군. " " 잊지말라구. 나는 엄연히 피가 끓는 조선의 청년이란 것을... " 한혁의 말들은 하나같이 가시가 돋혀있었지만 세이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아마도 한혁의 그런 점을 세이지가 좋아하는가보다고 생각될 따름이었다. 한혁이야말로 조선의 피끓는 청년인 주제에 왜 일본인인 세이지와 친하게 지내는 거람. " 일본은 많이 위험한가? " 걱정스러운 세이지의 목소리에 한혁이 코웃음을 쳤다. " 자네가 쏟아부은 총탄의 몇배로 미국이 쏟아부을 태세더군. " " ............. " " 걱정되면 본가에 한번 다녀오지 그래. " ".. 아니... 어차피 일본은 패배한다. 전쟁도 그 끝을 질때가 됐어. " 조국의 패배를 씁쓸하게 내뱉는 말은 오히려 나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미래를 이미 보아버린 나외에도 과거에서 운명을 예측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것이 세이지라니.. 그의 선견지명과 현명함이 오히려 가슴이 아파왔다. " 일본이 시작한거야. 너무 많은 업보를 안고 시작한 전쟁따윈 끝이 좋을 리 없어. " "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주도한 것이 모든 일본인이 아니듯 우리에게도 소중하게 보호받아야 할 어린아이가 있고 부모가 있어." " ................... " 안타까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과 함께 나는 조그맣게 깨달았다. 이 둘은 자신들이 처한 환경이 주는 갈등을 배제한 근원적인 것들을 알고 있구나. 어쩌면 그것이 뼛속까지 조선인으로 느껴지는 한혁과 일본의 지지세력인 세이지가 한방에 앉아 담소를 나누게 할 수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유에상은 앞으로 조선과 일본이 어떻게 될 것 같은가요? " 난데없이 던져진 한혁의 말에 혼자의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깜짝 놀라버렸다. " 아.. 저는... " 나의 당황한 기색을 느꼈는지 세이지가 얼른 대꾸했다. " 유에는 바깥출입을 거의 못해서 사회동향에 대해선 잘알지 못해. " " 아, 그래요? 뒷채에 소일거리가 많은가 보지요?" 또 비웃음... 기분이 상했다. 저 잘난척하고 오만한 남자앞에서 무시당하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인지. 그래 자세히는 모른다. 그렇지만 역사시간에 공부는 열심히 했다구. " 제 생각엔.. "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둘의 시선이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 세이지의 말대로 일년안에 일본은 패배하고 조선이 해방됩니다. " " .........! " " 뭘로 그렇게 확신하지요? " 나의 조심스럽고도 단호한 말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한혁이 꼬인듯한 말투로 물었다. " 확신이 필요한가요?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마는 것뿐 ." "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만다.... 마치 점쟁이같은 말투로군........또 일어날 일이 뭐가 있나요? " 또 시비조다... 설마 세이지가 일본인이라 이런 시비조를 못알아들어서 친한 건 아니겠지? " 조선은 해방되지만 승전국들이 조선을 나누어먹으려 들겠지요." "........... " " 얼마간 열강들에 의해 지배를 받다가 조선 내부에서 전쟁이 발발할 ...." 어색한 침묵이 몸에 와닿아 입을 다물었다. 너무 자세히 아는척하는 것도 좋지않다. " 대단하군요. 미래를 예측하는 통찰력인지 정말 점쟁이인지... 그럼 이것도 대답해보겠어요? 내 운명은 어떻게 되나요? " ' 운명은 슬픈것이다.' 왜 머릿속에 그 생각이 번쩍 스쳐갔을까. 언젠가부턴가 나를 지배하고 있는 주문과도 같은 말. " 운명따윈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제가 보기엔 성격으로 보아서 아주 장수하실 것 같습니다." " 성격이 어떤데요? " " 옛부터 성격나쁜 사람이 단명하는 일은 없답니다." " 유, 유에~!!" 당황한 세이지의 목소리 뒤로 한혁의 호쾌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 핫핫핫~!!! 꽤나 만만치 않은 사촌을 두었군.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는군요. 좋습니다. 잠자코 받아드리지요. 저도 제가 성격좋다고 생각한 적은 없으니까." 나는 새침하게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 더 미움받기 전에 물러가는게 좋겠군. 한밤중의 담소 잘 즐기고 가네. " 몸 일으키는 소리에 부스럭거리며 따라 일어서는데 이내 아까 정원에서의 그 묘한 향내가 곁에서 느껴지면서 미닫이 문이 스르륵 열렸다. " 다음에 또 보지. 목련꽃이 만개하기 전에. " 세이지의 귀에 들렸을지 안들렸을지 모를 조그마한 중얼거림이 귓가에 들릴때쯤엔 이미 향내가 사라진 후였다. 세이지가 추운바람에 나오지 말라고 말리는 바람에 문이 닫히자 얼른 찬바람 멀리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잠시 앉아 있으려니 방금전까지의 긴장이 모두 풀려나가면서 이상한 기분이 온 몸을 감돌았다. 왜 이런 심란한 느낌이 드는걸까. 그래 심란하다는 것 밖에는 다른 표현이 없다. 그 향... 절에서나 맡을 수 있는 그 향... 그게 머리를 어지럽히는 요인일까? 그 향내를 어디선가 ............맡아본것 같다... 5. 이케지마의 화 시대적인 상황은 매우 급박한 때에 놓여져 있었지만 나는 이케지마의 뒷채에 다소곳이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간간히 듣는 소식들은 세이지를 통한 것들 뿐 어느 틈엔가 하인들도 말수가 적어져서 나는 적적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아마도 그는 나에 대한 뜬 소문들이 하인들을 통해 나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한혁이 다녀간 이후로 모르는 사람들로 많이 일손이 바뀌었고 하인들도 줄었다. 갑갑하다고 특별히 여기지도 않았지만 자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새장에 고이 모셔진 새처럼 나는 소중히 보살펴지고 있었다. 내가 여기에 던져진 이유를 도저히 모를 정도로 안락한 생활이 계속됐다. 분명 언젠가 변화가 있을 테지만 그것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어제가 오늘같고 오늘이 내일같은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세이지는 매우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가 어떤 일들을 하고 다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없으나 일본의 패망이 다가올 즘에 맞추어 그가 바쁘다는 것은 웬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을 야기시켰다. 나는 늘 그가 고마웠고 그의 안전이 걱정스러웠으며 내가 도움이 될수는 없으나 위급한 때 그가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미래를 얘기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일본 사람 하나 돕는다고 나의 민족에게 큰 누가 되지는 않으리라. 겨울이 어느새 조용히 걷혀가고 있었다. 아직은 찬 바람 속에 실날처럼 담겨 있는 봄의 기운은 현명하게 기다린 목련에게 살며시 노크하며 맴돌았다. 또한 봄은 나에게도 실려와 아직 추운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나를 자꾸 밖으로 이끌었다. 봄의 신선한 공기는 볼 수 없기에 더 향기롭다. 정원에서는 새싹들의 냄새가 싱그럽게 퍼져가고 있었고 그것은 겨울이 저너머로 쫓겨가도록 더욱 한 몫을 했다. 정원 한 쪽에 웅크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땅을 가만히 쓸었다. 차고 거칠은 그 위에 사라락 쓸리는 조그마한 잎들... 정원사는 매우 부지런해서 이곳들을 언제나 정리해놓는다. 그 이후엔 내가 나와 정원의 모습이 엊그제와 다른, 어제와 다른 그 조금씩의 차이를 느끼는데 작은 즐거움을 찾는다. 목련꽃의 향기는 내가 볼수 없는 그 화려한 백색, 또는 자색을 대신하여 나에게 향기의 아름다움에 대한 흥분을 선사한다. " 경서, 아직 날씨가 찬데 또 나와있는거야? " 겨울이 지나가던 말던 언제나 부드럽고 따뜻한 세이지의 음성이 옆에서 들려왔다. 나는 일어나 고개를 들어 웃어보였다. " 새싹들은 추워도 나와있잖아. 이미 봄이야. " " .. 봄이 와서 좋아? " " 난 예전부터 겨울을 가장 좋아했는데 이번 해엔 겨울을 너무 오래 지내서 좀 싫증났어." " ............ " " 새 봄이 오기를 기다렸어. 그래야지만 여행이 끝날 것 같은 기분이야. " " 여행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데? " 여행이 끝나면... 집에 돌아가는 거야...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는 우리 집. 할아버지가 밀어주던 그네를 다시 한번 탈 수 있는 놀이터. 내 친구 재욱이와 성주, 진규등을 만날 수 있는 나의 학교. 바로 소중한 것들이 있는 곳에 돌아가는 거야. 대신... 세이지는... 고마운 사람은 여기 남겨두고 가야해. " 여행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데? " 그의 목소리가 재촉하듯 재차 울렸다. 나는 손을 더듬어 그의 손을 잡았다. 나보다 5살 차이밖에 안되는 훨씬 크고 마디가 굵직굵직한 손이다. 어색하게 잡혀 있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 세이지. 당신에 대해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평생 잊지 못할 거야. 만약에 .. " " .......... 만약에 뭐.." 그의 음성이 어두웠다. 내가 무슨 말할지 아는 것일까? " 만약에 내가 돌연히 사라진다고 해도 나 미워해선 안돼. 알았지? 은혜도 모르는 놈이라고 막 화내지 말라고. " 후일을 대비한 안전책이었을까? 나는 언젠가 있을지 모를 이별에 대해 그에게 미리 얘기해두고 싶었다. 나도 꽤나 소심한 놈이었다. 평소에도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안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을 유달리 못견뎌했다. 더욱이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내 신상에 일어난 일들이 영문도 모른채 별안간 일어난 것들이었지만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여행이 끝나면 반드시 돌아간다. 별은 제자리를 찾아 돌아간다. 그것이 운명이다. 절대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 신념은 신기하리만치 추호의 의심조차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미리 바리케이트를 쳐두고 싶었던 것이리라. " 내가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조선인인데도 거둬주고 보살펴줘서 늘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그러니까 훗날에 내가 말도 없이 사라져도 그게 내 본심이 아님을 꼭..."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몸은 세이지의 품안에 턱 안겨버리고 말았다. 그가 잡고 있던 손을 당겨 나를 감싸안은 것이다. 그가 어찌나 세게 나를 껴안는지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 헉... !.. 세, 세이지! ..왜 그래, 무슨 일이야?!" " ... 놔주지 않을거야. " " .....뭐? " 도대체 그가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바둥거리던 걸 멈췄다. " 난.. 봄이 너무 일찍 찾아와버렸어.. 이미 만개해버렸다 이말이다!! " " 세이지... 무슨 말하는지 나는... " " 안보인다고 모르척 하기냐. 내가 왜 신원도 확실하지 않은 조선인을 이케지마 가에 들이겠어?" " 그건 세이지가 인정이 많아서..." " 되지도 않는 소리! 밖에서는 철의 이케지마라고 불리는 나다." " 그, 그럼 왜.." 그의 손이 어느 새 풀려 내 얼굴을 마주 잡았다. 나는 얼굴이 들리워진채로 보이지도 않는 그의 얼굴을 향해 멍청히 눈을 껌뻑거렸다. 어느 순간에 그의 호흡이 가까워져 왔다고 생각했을까. 강렬하게 부딪혀 와 닿는 타인의 입술이 가진 촉감은 정말 섬뜩할정도의 놀라움이었다. 경계심없이 열려있던 입사이로 들어오는 세이지의 혀는 격하게 돌진해 들어와 마치 혀뿌리를 뽑아버릴듯 덤벼들었다. 내 입안 온곳을 샅샅이 휘돌고 내 혀를 감아 올렸을때의 그 느낌은 내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런 걸 사람들은 진심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걸까? 색다른 느낌. 좋다고 표현할 수도 싫다고 표현할 수도 없는 이상한 느낌이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등줄기를 타고 순식간에 그리고 수십번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나 정신만은 더욱 또렷해져 숨이 가빠진 것을 참을 수 없게 되자 그의 몸을 떠밀어 내려고 했지만 세이지는 막무가내였다. 그가 가진 평소의 부드러움은 온데간데 없이 나를 그의 품에 가둔채 마치 점령해버릴 듯 입술을 탐하자 나는 공포에 질려버렸다. 이럴때 눈이라도 보였음 좋으련만. 까만 어둠은 도저히 저항하기 어렵게 만든다. 세이지의 몸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 역시도 숨이 가쁜 듯 잠시 숨을 몰아쉬었고 나는 거의 숨이 넘어갈듯 했다. " ..... 떠나면 용서 안한다.... " 아직도 진정이 안되는 나에게 던지는 그의 말은 겨울 밤바람보다도 차가웠다. 이것이 철의 이케지마? " .... 세이지.. 어째서..나에게.." " .......... 잠시 본가에 다녀올 일이 생겼어. 비밀리에 잠시 다녀오는 거니까 기다리고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 별안간의 동문서답에 나는 어리둥절해했다. " ........ 일본에 ? " " 기다리고 있으라고... 나 불안하게 만들지 말고.... " 그가 내 머리를 안아 다시 가슴에 품었다. 귓가에 들려오는 고동소리는 세이지의 것? " 세이지? " " 잠시도 떼놓고 싶지 않은데 ... 불안해서 미쳐버릴 것 같아... " 나는 그를 떠밀고 고개를 쳐들었다. " 잠깐!! 지금 일본에 간단말야? 무슨 생각이야! 지금 미국이 폭격을 퍼부어대고 있잖아. 그렇게 위험한 데를!! " 다급한 마음이 되어 그의 옷을 부여잡고 외쳐댔다. "... 그렇기 때문에 가는거다. 나라에 관련된 문제가 바로 집안에 관련된 문제니까 가야해. 금방 돌아올거다. 열흘안에 돌아올수 있어." " 열흘이 무슨 눈깜짝할 새인줄 알아?! 사고는 단 한순간이라고!! 이케지마가 사람은 폭격도 피할 수 있어?!" " ... 경서..." " 가지 마. 너무 위험해. 어차피 끝날 전쟁이야. 끝날 전쟁인 줄 알면서 일부러 목숨을 버릴 필요가 어디있어." " .............. 가야해... " " ........................ " 그의 고집스러움이 너무나도 맘에 들지 않았다. 갑갑할정도로 맹목적인 말투. 정말 싫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가다니. 이곳이 훨씬 안전한데... 이 정원 안에만 있으면 안전한데... 일본은 전쟁이 끝나면 어차피 돌아갈 건데... " ....... 같이 가... 두고가기 불안하다며... 차라리 같이 가... " " 안돼." 단호하게 내뱉는 말투에 화가 났다. " 안돼긴 뭐가 안돼? 지금 위험한거 아니까 나 못가게 하는 거잖아. 그러면서 자기는 간다는 거야? " " ... 제발... "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그 말 한마디에 떼를 쓰며 소리지르다가 입을 다물었다. 더 안타까운 건 세이지 자신. 몸이 이곳에 있지만 역사의 뒤안길에 놓인 나같은 존재따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주역인 그를 말릴 수있는 자격따윈 없는건가. " ...........언제야... " " 오늘 밤에... " " .....그렇게 갑자기..... " 놀라움에 시무룩한 기색이 돌자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 걱정하지 마... 소중한 것을 놓아두고 자신을 위험스럽게 만들지는 않는다. " " .......... " " 너는 모를거다.... 너를 처음 본 이래로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해왔는지... " " 세이지 ..... " " 너는 봄바람보다 더 따스하고 목련보다 더 향기로와 나에게는 너와 함께한 가을, 겨울 모두가 봄이었지. " 그는 내가 남자라는 것은 전혀 개의치도 않는지 어울리지도 않는 표현들로 나를 당혹하게 하고 있었다. " 소문이 그런식으로 났던 것도 무리가 아니야. 나는 너에게 정신없이 빠져서 하인들의 시선도 아랑곳 하지 않은채 너를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 " ....... " " 그 전까지도 그런 사람은 없었어.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내 인생에 소중한 인연은 너 하나뿐이다. 민경서. " 왼손이 들리워지는가 싶더니 손등위에 따뜻한 그의 입술이 살포시 닿았다 떨어졌다. " 나는 남자야. 세이지.. " 고작 한다는 말이 그거였지만 내가 할 수있는 가장 큰 방어막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이었다. " 아무려면 어때. 너인데... " 역시나 막무가내.... 하여튼 상식이 통할거라곤 생각하지도 않았다. " .................. 그렇게 사랑한다면서 두고 가는거야? " 침묵이 들렸다. 달갑지 않다. 그 표정을 볼 수 없으니. " ................. 자꾸 네가 불안해하면 내가 더 불안해져. 정말 못돌아올 것 같잖아. " " .. 꼭 돌아와.. " "..응... " " 꼭 돌아와.... 열흘후엔... " " 그래... 그때까지 대답이나 준비해둬... " " ... 무슨 대답? " "..... 지금 고백에 대한 대답.... " 얼굴이 달아올라버렸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대답해야 하는 거야. 이런 경우엔... 지금껏 여자애들한테 고백을 몇번 받아봤지만 사귀어 본적은 없었다. 이것 역시 NO라고 대답해도 되는걸까? " 무사히 다녀오기나 해.... " 애써 퉁명스럽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만 그의 손길이 내 얼굴을 감싸 안는다. 뒤이어 시작되는 두번째 입맞춤. 그러나 좀전과는 다른 매우 부드러운 느낌으로 입속으로 침범해 들어온다. 다시한번 저릿한 느낌이 등줄기를 달리고 나도 모르게 팔을 들어 그의 목을 감아안아버렸다. 6. 남겨져도 거추장스럽다. 그가 약속한 것은 열흘이었지만 열흘은 이미 넘은지 오래. 그로부터 벌써 한달도 넘게 더 지나가고 있었다. 난 처음엔 하인들에게 세이지의 근황을 물었지만 그들은 아예 주인의 행방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하인은 그가 경성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답답했지만 그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기면 이곳도 자연히 알게될 거란 생각에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만 믿고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지만 단하나 깨닫지 못한게 있었다. 그에게 위험이 생길 수 있듯 여기서도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 초저녁부터 피곤해서 그 날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정신없이 잠에 빠져있을때 점점 숨이 가빠오는 느낌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 흡 !'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 몸위에 올라타 두 손을 누르고 입을 막은 한밤의 침입자들에게 내가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더욱이 서늘한 느낌이 목에 와닿았을때 나는 움찔해버렸다. " 조용히 하는게 좋을거야. 칼날은 더할나위없이 날카롭다. " 음산하게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온몸에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인 내 손과 발을 포박하고 가뿐히 등에 들처업은 그들은 방을 조심스럽게 나가 담장을 넘었다. 이런 식으로 이 집을 나가게 될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그들의 위협이 너무나도 무서워서 전신이 마비될 것 같은 공포심에 휩싸여버렸다. 그들이 나에게는 낮이나 밤이나 별반 다를게 없는 밤길을 끝도 없이 뛰어갈 때 나는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세상이 늘 밤같은 나를 깨운 것은 차디찬 물 세례. " 일어나봐. 육시랄 남창새끼. " 나를 부르는 게 분명한데 호칭은 영 맘에 들지 않았다. 몸은 의자에 앉혀져 팔목이고 다리고 여전히 포박당한채. 지금 내 주위의 사람들은 나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은게 분명하다. " 이게 그 이케지마가 끔찍히도 아낀다는 년이야? 새끼, 진짜 쪽발이 새끼 홀릴만큼 반반하구만." " 근본들이 글러먹었으니 사내새끼 후장이나 쑤시고 살지." " 야, 어서 눈 떠보라니까. " " 거 참, 얘기 못들었어? 장님이라잖아. " " 아, 그렇지? 핫, 그 쪽발이는 정말 취향 별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소문이 무섭긴 무섭구나. 이곳은 오해를 풀 여지도 없는 곳일테니 영락없이 나는 세이지의 그렇고 그런 사람이 되는구나. 그렇지만 이 사람들은 같은 민족이니 어쩌면 잘 이해해 줄 수 있을지도 몰라. 잘 이해해줄 수 있을지도... 그런데... 뭘?... 거친 손이 얼굴을 이리저리 잡고 살폈다. " 이 쌍년아. 네 누이와 형들은 전쟁터에 끌려가서 총알받이에 밑받이까지 하는데 네 새끼는 쪽발이 집 안에서 호위호식이냐? " " 내 동생이었으면 넌 벌써 박살났다. 에잇! 퉷! " 평생을 살면서 얼굴에 침 맞을 일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해봤다. 이런 모욕을 받으려 시간까지 거슬러 여기까지 오게 된 건 아니겠지? 너무나도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허망한 일로 끝이 나진 않겠지? 그렇지만 지금 상황은 놀랍고도 비참하다. 그리고... 무섭다. " 어디다 함부로 침을 뱉고 그래? 아니 손발은 왜 묶어 놨어? 어차피 장님이라 도망도 못가는데." 위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리는 목소리다. " 그거야 모를 일이지. 지 나라도 팔아먹을 놈인데 그런 독기로는 뭔들 못하겠어? " " 쓸데없는 소리말고 줄 풀고 있게. 대장님이 좀 있으면 오실것 같으이." " 아니. 벌써 오셨는감? 만주가 요 코앞이라도 되는갑네. " 곧이어 손발을 옥죄고 있는 줄이 풀려나갔다. 손목이 저려와 매만지고 싶었지만 그럴 기력조차 없었다. 너무 꽉 조여놔서 살갗이 벗겨진 것 같다. 저벅거리는 소리가 여러개 들려왔다. 아까 그 사람이 말한 대장이라는 자일까? 도대체 무슨 영문으로 나를 잡아왔을까? 설마 세이지에게 해를 입히기 위해서? 그렇다면 절대 도움을 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를 위험해 처하게 하는 것은 도저히 내가 견뎌낼 수 없다. 이런 마음으로 다잡고 있을때 뜻밖에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잘들 있었는가. " " 아! 대장님!! 무사히 다녀오셨습니까? " " 그럼 무슨 별일이야 있겠는가? " " 선생님은 안녕하시구요? " " 건강하기가 이루말할데 없으시다네. 그럼 좀 다들 나가 있겠는가, 그와 할말이 있으니." " 아, 네! " 좀전과는 다른 다부진 말투로 대답한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히자 뚜벅뚜벅 절도 있는 구두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추렸다. "손에 상처가 났군. 미안하게 됐네. 나 없는 사이에 급작스럽게 치룬 일이라 말이야. 그 친구들이 좀 함부로 대했나 보네 그려. " "............. " 좀전의 사람들과 달리 예의 바른 목소리는 확실히 이 사람이 신분이 높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 사람들이 억세서 좀 그렇지 본래는 순한 사람들이라네. 원래 우리 조선인들이 그렇지 않나. " " ............ " " 마치 자네처럼 말일세." 나처럼이라니.... 그 말속에 무언가 뼈가 느껴졌다면 착각일까. " ................. 저를 데려온 이유가 뭡니까? " 그가 들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들은 모양이다. 어딘가에 털썩 앉는 소리가 들리더니 말문을 열었다. " 자네에게 조선인으로서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주겠다는 거지. " " .......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시오 " " 이케지마 가가 어떤 가문인지 아나?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어느 곳에도 그 가문의 손이 닿지 않는 데가 없어. 심지어 조선의 산업의 전반을 이케지마가 먹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 .......... " " 그들은 옛부터도 일본의 큰 지배세력 중 하나였지만 그 힘을 더욱 강건히 한건 조선을 발판으로 했다고 볼 수 있어. 즉, 조선을 갉아먹고 자랐다 그 말이지." " ......... " " 이번엔 우리가 그 힘을 반대로 이용해보고자 하는 것이라네. " " 그게 저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 " 후후... 모든 일은 사람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전쟁도 결국 누군가의 결정이 도화선이 되는 거라고 볼 수있지 않겠나. 결국 몇몇 사람의 마음만 움직이면 많은 상황을 반전시킬 수있다 그 얘기라네. " " .......... ? " " 지금 이케지마의 떠오르는 실력자가 누구인지 아나? 바로 이케지마 세이지야." " ...! " " 그의 숙부인 겐자부로는 굉장히 똑똑하고 사리에 밝아서 그동안 자신의 가문을 엄청나게 키워놨지. 그는 자기 세대에서 이것이 끝날 것을 걱정하고 미리부터 후계자를 길렀어. 그것이 바로 세이지 이케지마다." " ..세이지는 보통 일본인과는 달라요. " " .... 뭔가 잘 못 생각하고 있군... 어려서부터 영민하기로 유명한 그다....겐자부로가 그냥 그를 후계자로 지목했을 것 같나? 겐자부로에겐 아들이 셋이나 있다네." "... 당신은 그에 대해 잘 몰라요. " 세이지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무작정 돌진하는 사람이 아님을. 그가 얼마나 인간적인지. 그가 아무에게나 총탄을 휘두르지 않을 사람임을 당신들은 잘 모르잖아요. " 알 필요따위가 있을까? 그는 조선의 수많은 젊은 피를 이국땅에 뿌리게 하고 내 나라 내 조국에서 나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데 혁혁한 공로자야. 그것만으로도 그는 조선에게 큰 죄를 진 것이다. " " 그래서 어쩌자는 거죠? 당신들이 그를 심판이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 " 우린 그렇게까지 오만하진 않아. 생각같아선 이케지마의 씨들은 모두 없애고 싶지만 그런다고 될일이 아니란 걸 알고 있으니 말이야. " " ....... " " 그렇게 안해도 우리는 해방을 맞게 될 것이다. 일본이 전쟁에 패하면 그렇게 될테지. " " 그럼 뭘 더 바라죠? " 내 목소리가 매몰차다고 나 자신도 느꼈다. 잠시의 침묵 후 흘러나오는 그의 조그마한 한숨... 웬지모르게 가슴이 움츠러 들었다. " ........... 일본인과 함께 살을 맞대고 살아서 그런지 조국에 대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군.. 정말 조선인이 맞기는 한가? " " .......... " " 일본의 패전으로 맞는 해방은 오히려 나라에 혼란만 가져올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자주 독립이야. " " .......자주독립... " " 그렇네. 이대로 무작정 해방되어 버리면 미국, 소련, 프랑스 이런 강대국들이 우리를 가만히 둘 것 같나? 우리 민족이 아니면 모두 먹이를 앞에 둔 짐승에 불과한 거야. " " ..... 그래서 ..... 군대를 조직하고 있겠군요. " 그가 생각외라는 듯 작은 탄성을 지르는 것이 들렸다. " 생각보다 똑똑하군.... 그래 우리는 만주를 발판으로 군대를 조직하고 맹훈련중이지. 우리가 스스로 우리 땅을 되찾을 수있도록. " " .... 가능한가요 ?" " 지금 일본은 많이 쇠약해져 있는 상태다. 이런 좋은 기회가 없지. 다만...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부분들도 있어. " " ..... ? " " 전투비행기등을 비롯한 군사기기 말일세... 너무 엄청난 자본이 들어가지. " " ....... 그것이 이케지마와 무슨 관련이 ... " " 이케지마는 경제적인 부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군수 산업에 있어서도 일인자다. 그들이 일본의 전쟁물자를 거의 대고 있다고 해도 빈말이 아니야. " " ...... " " 그것을 우리가 좀 썼으면 하는 것이다. " " ..... 그게 어떻게 가능... " " 말했지 않나... 한 사람만의 결정으로도 생각지도 못한 많은 것이 달라진다고... 우린 이케지마 세이지의 마음만 손에 넣으면 되는 거야.. " " 세이지의 마음? " " 바로 자네를 말일세. "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그만 멍해져 버렸다. 평소에 그렇게 멍청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 이런 상황은 잘 소화가 될지 않는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 나를 통해 세이지의 마음을 손에 넣는다고? 그게 가능해? " 말도 안됩니다... 제가 그에게 있어 그의 조국과 가문을 배반하게 만들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모처럼만에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 자네는 왜 아니라고 생각하나? 궁금하지 않나? 철의 이케지마가 자네를 선택할지 나라와 가문을 선택할지? " " 그런 선택, 저는 바란적도 없습니다. " 또, 일순의 정적... 그가 나에 대해 실망하고 있는 기색을 단번에 느낄 수 있다. 왜 만나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의 실망에 죄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일까. 내가... 어쩔 수 없는 조선인이기 때문에... " ..........이케지마를 알고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자네에 대해서 알고 있지. 모두가 욕한다네. 자기 나라를 능욕하는 자에게 몸을 파는 천한 놈이라고 말일세. " " ................... " " 이케지마가 자네를 일본인 사촌으로 위장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아나? 하다못해 자네앞으로 거짓 출생증명서까지 만들어져 있다네. " " .... 출생증명서까지...? " " 그가 뭘 걱정했다고 생각하나?.... 바로 이런 상황이지 않겠나..... 같은 조선인으로부터도 경멸당하는.... " " .................... " " 그러나 나는 좀 생각이 다르다네..인간과 인간 사이에 통하는 정을 믿지.. 자네와 이케지마 사이에도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없는 그런 것이 존재하리라고 믿네. " " ......... " "..... 이케지마에겐 선택을 강요하겠지만 자네에겐 아니야. 자네는 조선인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한다고만 생각하게. 이미 자네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 " " .......... " " 사람들에게 자네를 잘 대우하라고 이르겠네. 누가 뭐래도 우리는 단군의 한핏줄이 아닌가. "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려놓는 그 사람의 말은 매우 다정했다. " ..... 이보세요. 어르신.. " " ...... ?" " 저는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 " 일이 해결된 후엔 자네의 선택에 맡기겠네.. 그에게 돌아가서 영원히 조국을 버리던가. 아니면 그를 버리고 우리와 함께 갈것인지는... " " ....... " " 기운내게... " 어깨를 몇번 토닥이고 멀어져가는 그의 인기척은 웬지 모르게 서글픔이 들게 했다. 그는 나를 이해하려 하지만 결국은 나라를 위해 이용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그 나라는 나의 조국이기도 하지 않은가. 나는 정말 세이지의 아래에만 있어 내 조국을 등한시 하는 것일까. 내가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그래도 되는 것일까. 나로 인해 세이지가 일본을 배신하건 가문을 버리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건가? 아니면 조선의 자주해방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해내게 되었다고 기뻐해야 하는 건가. " ...세이지..... 미안해.... " 참았던 눈물이 방울이 되어 뺨을 타고 굴렀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던 나를 사랑한다고 믿는 마음만큼 고통스러울 것은 틀림없다. 나를 구해주고 보살펴 준 댓가를 그런 식으로 치루게 하다니... 은인을 그런 절망속에 몰아넣게 되다니... 이런 걸 위해 시작한 여행이라면 그만 끝내고 싶어... 7. 향이 있는 남자. 5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낯선 곳에 끌려와 생활하게 된 것도 한 달 가까이 된 듯 하다. 그 대장이란 사람과 만난 다음날로 나는 어떤 차에 실려 조용한 시골로 옮겨졌다. 집의 다니는 구조로 보아 오래된 한옥집 같아 보이는 그 곳 한 쪽 별채에 방을 얻은 나는 시중드는 조선인 여인 둘과 함께 생활해가고 있었다. 집은 매우 큰 듯했으나 나는 집 깊숙한 곳에서 일체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에 실제로 어떤 사람들이 그곳에 사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방의 구조등을 익히는 데만 꽤 시간이 걸려서 처음 며칠간은 온몸에 멍이 들지 않는 곳이 없었다. 조선 여인 둘은 모녀 사이로 그 엄마는 말수가 적어 곧 정이 붙지는 않았으나 내가 어렵고 곤란한 상황일때 재빨리 도와주고 챙겨주는 것을 보면 꽤나 믿음직스럽고 속정이 깊은 사람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그 딸은 이름은 소난이고 나이는 열살이라 하는데 그 나이때가 그러하듯 입이 가볍고 활달한 성격이어서 나와 금방 친해졌다. 평소 그녀를 통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좀 듣고 적적함을 달래었다. 이곳에 와서도 나의 유일한 낙거리는 마당을 거닐며 소박한 정원을 꾸미고 그 향을 맡는 것이었다. 이케지마가에선 세이지가 책도 읽어주곤 했지만 소난이는 여적 글도 몰랐다. 이렇게 개화된 세상에 학교도 안보내나 싶어 나라도 좀 가르치고 싶었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처지라 가당치 않은 욕심일 뿐이었다. " 어서 들어가 이것 좀 드셔보셔요. 안채에서 맛난 부침개를 했구만요. " 요란스럽게 달려온 소난이가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옆에서 재촉을 하는 바람에 나는 하는 수 없이 고랑을 내다가 손을 털고 일어섰다. " 네가 먹고 싶어 그렇게 호들갑인게지? " " 아유. 도련님도... 부엌에선 함부로 손대면 맞는단 말이어요. " 활짝 웃는 듯한 목소리에 나도 즐거워하며 더듬더듬 마루에 걸터 앉았다. " 잠깐만 기다리셔요. " 부리나케 달려가 손씻을 물과 수건을 준비해와서 내 손을 씻기는 소난이를 보면 커서 지 어미를 닮을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 자, 여기 저범이요. 부침개는 이쪽에. " 내 손에 젓가락을 쥐어주고 끌어다 얼른 부침개를 집으라고 성화하는 통에 나는 하나 집어다 입에 넣었다. 입안에 고소하게 퍼지는 맛이 꽤나 일품이다. " 정말 맛있구나. 이제 내가 하나 먹었으니 너도 어서 먹으렴." " 예. "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부리나케 대답하곤 우물거리며 신나게 먹는다. " 그런데 갑자기 웬 부침개라니? 오늘 누구 생일이야? " " 아, 그게 경성서 주인마님 사촌동생이 오셨가지구요. 말이 사촌동생이지 마님이랑 나이차이도 많이 나는데 이 집안 종손이라 대접이 어찌나 극진한지 모르겠어요. " " 그래? " " 예, 근데 어찌나 훤칠하고 잘생겼는지 안채 식구들 모두 술렁술렁한다요. " " 하하.. 그래서 너도 반했냐? " " 아유, 무슨 말씀을 고로케 섭하게 하셔요? 그 도련님이 아무리 잘생겨도 우리 도련님만 할까? " " 너도 눈이 삐었구나. 내가 어디가 인물이 좋냐." " 얼레? 그럼 그 인물이 좋은 인물이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다 나가 죽으란가요? " 웃어버리긴 했지만 가끔 의문스러울 때가 있다. 지금 내 얼굴이 내가 맞긴 한건가. 이곳에 온 이후로 실제로 내 얼굴을 본적도 없는데 말이다. 게다가 나는 내가 잘생겼다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 일본서 공부를 하다가 거가 위험해지니께 집안에서 성화를 해 돌아왔다고 하대요. 계속 경성 본가서 지내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가 몰라요. 여 시골에까지 행차를 하고." " 일본에서 왔다고? " 귀가 번쩍뜨였다. " 야. 일본의 유명한 학교서 공부댕기다 왔다하더라구요." " 그것이 정말이냐? " " 들은 게 그러니 정말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요. 근데 왜요? " ".. 아, 아니다. " 그 사촌이란 자가 단지 일본서 공부하다가 왔다고 해서 세이지의 행방을 알리는 만무한데 .... 그러나 지금은 어느것이라도 그와 관련된 것이 있으면 붙잡고 캐물어보고 싶은 지경이다.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은 날 볼모로 세이지와 거래를 하고 있기나 한 것인가? 세이지가 거절했나? 그렇지 않다면 나한테 아무 연락도 오지 않을리가 없다. 아니, 다른 건 다 젖혀두고 무사하기나 한 걸까? 혹시 무슨 사고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열흘이 벌써 두달이 넘어버리다니.... 싱그러운 새싹의 향기가 감돌고 목련이 수줍개 기지개를 피게 시작하던 정원에서의 그와의 내 생애 처음의 입맞춤들... 아스라이 생각나 고개를 떨구었다. 밤이 되어 모든 사람이 잠들어도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하루종일 어둠속에 있는데 밤이라고 뭐가 특별할까.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고 마음은 먹고 있지만 이곳에 오게 된 이후로 잠과 식사는 점점 더 줄게 되는 것 같다. 마루에 걸터 앉아 기둥에 몸을 기댔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마치 앞못보는 나 들으라는 듯 아주 정겹게 노래를 들려준다. 그 속에서 나는 화음을 찾고 가락을 짓는다. "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마리 돗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 집에서 혼자 불러도 슬픈 노래를 이런 타향살이 아닌 타향살이를 하면서 부르니 더 마음이 울적해져 왔다. 자꾸 쓸데없이 울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하지만 감상적이지 않게 되기엔 너무 막막하다. 얼른 눈물을 훔치고 약간 서늘하게 느껴지는 바람에 어깨에 겉들인 겉옷을 추스리는데 생각지도 못한 묘한 향이 맡아졌다. ' 이것은.... ' 이 향을 나는 분명 맡아 본 적이 있다. 날이 매운 찬 어느 겨울밤에 이케지마의 정원에서... 나는 일어나 기둥에 손을 짚고 귀를 곤두세웠다. " 거기 누구 있나요? .... "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대꾸가 없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지만 내 감이 틀릴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신을 더 예민하게 가다듬고 보니 그 향내는 점점 더 확실히 맡아졌기 때문이다. " ........................... 최한혁씨......? " 여전히 들려오는 건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뿐... " .......... 당신이지요? ... 왜 대답하지 않아요? "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뿐............... " ................................... 설마 눈이 보이는 건 아니겠지? " 그의 음성이 들리는 순간 나는 활짝 웃었다. 정말 그 인간이다!!! 그렇게 못마땅했던 사람인데 이런 곳에서 만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 당연히 안보이니까 제 쪽으로 와주세요. 어느쪽을 보고 이야기해야 할지를 모르겠잖아요. " 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향내가 점점 짙어지자 어느새 그가 왼팔을 잡고 있었다. 나는 너무 반가워 그 손을 잡았다. 약간 움찔한 듯한 기색이었지만 신경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나는 흥분해있었다. " 정말 한혁씨 맞아요? " " ...... 나를 별로 안좋아했던 것 같은데 굉장히 반가워하는군." " 네. 저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정말 반가워요. 우리 앉아서 얘기해요." 나는 그를 옆에 끌어 앉혔다. 그는 정말 절에라도 다니는 걸까? 향내가 짙게 풍겼다. " 근데 나인줄 어떻게 알았지? " " 당신한테 향피우는 냄새가 나거든요. 독특해서 잊지 않고 있었어요. " " .................. " " 그런데 여기는 웬일이죠? " " ................ " 대꾸없는 그에게서 이상함을 느끼다가 머릿속을 스쳐가는게 있었다. 일본에서 공부하다 돌아온 사촌동생.... " ............당신이 경성에서 내려왔다는.......!!! " 뒷따르는 침묵으로 내 머릿속에서 맞춰지는 퍼즐의 조각들. 최한혁은 이 집과 관련된 사람. 이건 우연이 아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도 분명 알고 있었던 거야. 그 독립운동하는 사람들... 한혁에게 나를 넘겼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거야. " ........... 나를 데려온 사람들과 한통속이로군요....." 내 목소리가 굳어지면서 그의 손을 놓아버렸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세이지의 친한 친구인 그가 어떻게 그를 배신하고... " 세이지는 어떻게 됐죠? 무사하게 잘있긴 하나요? " " .... 그가 너처럼 남들에게 보호받고나 사는 존재인줄 아나? 일본이 멸망해도 그만은 끄떡없을 거다. " 별로 듣기 좋은 말투는 아니었지만 뜻하고 있는 내용이 반가운 것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마음이 놓여 굳어져 있던 입가에 미소를 올렸다. " 아무일 없는 거로군요... 걱정 많이 했는데... " " .......... 조선인인 주제에 자신의 나라를 침략하고 범한 일본인의 안위를 걱정하다니 가관이로군." " 그러기 이전에 우리 모두 사람이에요. " " 사람이기에 용서할 수 없는 걸 모르나? " " 당신은 세이지의 친구면서... " " 내가 그의 친구인 것과 조국을 위해 일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야. 세이지라도 나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 " ................... " ".........................아니.... 약간 달랐지... 세이지는... " 그의 말끝이 흐려졌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세이지는 무엇이 달랐나요? " 세이지가 그런 정도로 너를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위에서도 너를 이용하면서도 사실 이것이 통할까 반신반의했는데 그는 너무나도 순순히 우리의 조건을 들어준거야. " " ...세이지가.... " 숨이 턱하고 막혔다. 자기 집안과 나라를 배신하고... " 나는 세이지가 이런 상황을 예측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는 모두의 머리 꼭대기에서 생각하는 사람이지." " ................... " " 그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나를 찾아왔다. 나에게 너를 안전하게 지켜달라고 그러더군. 그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마치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어. " " 말도 안돼요. 세이지가 일부러 자신에게 그런 선택을 강요하게 만들리가... " " 그는 영민한만큼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야. 그 선택이 너로 인해 당겨졌을 뿐." " ...................... 세이지가.... " " ............. " " ............. " " ...... 네가 편하게 지내기를 바란다. 때가 되면 세이지에게 돌아갈 수 있을거야. " 그가 일어났다. 나는 왜 바보같이 또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걸까. 세이지... 세이지.... " 당신은..... " 그가 주춤했다. " 당신은... 그래도 세이지의 친구지요? " 세이지가 믿고 있는 만큼 당신은 그의 친구가 틀림없겠지요? " ........... 그래.... " 그의 목소리엔 힘이 있었다. 그래. 이런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당신들은 그 어떤 사람들보다 잘 어울릴 수있었을 거야. 당신들은 비슷하니까... " 나만큼 당신도 그를 걱정하는 거지요? ... " 조그맣게 중얼거렸지만 들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향의 여운이 옅어지고 있었다. 8. 이케지마 세이지 한혁이 곧 떠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그는 머물고 있었다. 소난이가 그가 여기서 쉬면서 공부할거라는 말도 했기에 당분간은 같은 집에 지내겠구나 싶었다. 세이지를 잘알고 있는 사람이 한 지붕 아래 있다는 것은 웬지 나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첫인상은 '무례하고 재수없는' 이었지만 그가 이렇게 위안이 될줄은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그는 하루에 한번 정도는 나를 찾아와 책도 읽어주고 같이 정원도 보살펴주었다. 나는 그에 대해서 감정이 매우 호전된 상태였다. 사실 오만한 점이나 못마땅한 점들도 있었지만 아직은 어린 소난과 달리 그는 말이 통했고 내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훨씬 많았기에 그가 찾아오는 것을 하루 일과의 낙으로 삼을 정도였다. 게다가 나라를 위해 일하는 독립투사가 아닌가? 약간 멋지다는 생각도 든다.. " 한혁씨. 어제 읽던 곳을 마저 읽어줘요. " 나는 그가 오면 책부터 펴들었다. 가급적이면 세이지에 대한 소식은 묻지 않았다. 그런 건 묻지 않아도 떄가 되면 그가 얘기해줄 것이 분명하니까. " 오자마자 책부터 읽으라니 너무한거 아닌가? " " 옛날엔 이런 책 지겹게만 생각되서 안읽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안되니까 마구 읽고 싶어져요. " 눈이 휘도록 웃어주며 그를 꼬드기니 그가 하는 수없이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폈다. " 윤 참판은 갑진을 한번 흘겨보고 일어나서, 무어라고 누구를 부르면서 안으로 들어간다. 허숭은 차마 갑진의 말을 들을 수가 없어서, '거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하고 갑진을 나무랐다. " " 에~이 .. 좀 리얼하게 읽어봐요. " 읽기 시작한지 십초도 못되어 나는 핀잔을 준다. " 내 참... 흠흠..... ' 거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하고 갑진을 나무랐다. '왜? 자네 따위 사립학교 부스러기나 다니는 놈들은 가장 애국자인 체하고, 흥, 그런 보성 전문학교 교수 따위가 무얼 알어? ' " 벽에 등을 대고 그가 어느새 책읽는 것에 몰입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은근히 실소가 나온다. 그 냉랭하기 짝이 없던 사람이 정말 저 사람이 맞는가 싶었다. 처음엔 하는 말마다 비웃음이요, 뒤틀린 소리나 내뱉고 그랬는데 지금은 꽤나 다정한 편이라고 생각된다. 세이지만큼은 아니지만 이 사람은 이 사람의 방식대로 나에게 부드럽게 대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엔 나를 세이지의 조선인 정부 취급하던 주제에.....후후 " 지금 듣고 있는거야? " " 아, 들어요. 얼른 읽기나 해요. " " 물도 한잔 안주면서 재촉은.... " " 눈 먼 사람한테 물 달라기는.. 소난아~~!!! 여기 물 한대접만 떠다 줄래? " 활짝 열린 문밖으로 소리높이자 소난이가 멀리서 대답하는 게 들린다. " 됐죠? 어서 읽어요. " 아마 못말리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겠지? 그런 생각으로 내심 즐거워지는 나였다. 굉장히 꼬여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가볍게 다루는 건 웬지 모르게 아주 즐겁다. 사실 그는 책 읽는 것을 그렇게 달가워하지는 않았는데 내가 금방 잠들어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꽤나 마음이 편해져서 잠이 솔솔 와버리기 때문에 바르게 앉아 있으려 해도 결국은 몸이 점점 기울어지다 바닥에 붙어버리기 마련이었다. 그는 내가 몸이 점점 기울어진다 싶으면 몇번이고 내 이름을 불러서 확인을 하곤 했지만 나중엔 포기하고 말았다. 그것때문에 그는 매번 읽던 곳을 또 읽어야만 했지만. 그런 일들은 그냥 일상적인 것이었지만 속으로는 나에게 다시한번 작은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접근하기 어려울 것 같았던 사람이 의외로 끈기있게 상대해주고 배려해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래서 사람은 첫인상이나 겉보기로 판단할 수 없구나 싶었다. 그가 나에게 책을 읽어주고 같이 산책을 해주는 등의 일을 해주는 대신 나도 그에게 제공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에게 그림모델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그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굉장히 뜻밖의 일이어서 소난이가 경성도련님이 내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일러 바쳤을때도 믿지 않을 정도였따. 처음에 얼마간 그는 멀리서 나를 스케치하다가 들킨 이후로는 대놓고 그림의 모델을 요구했다. 뭐 애초에 몰래 그렸다는 것조차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지만은 ... 그에게 나를 그리는 것을 허락한 까닭은 어떤 생각에서였을까. 내 모습을 이곳에 남겨두고 싶었던 마음이었지 않을까. 만약에 그 그림들이 운이 좋아서 몇십년을 살아남아 후세에 발견된다면 상당히 굉장한 기분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그림을 잘 간직해서 꼭 자손들에게 물려주라고 누누이 말했다. 물론 그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 한혁씨. 나 따분해요. 그냥 이렇게 앉아 있는 거 심심하다구요." " 그래서 어쩌라구. 잘 그려달라고 한건 너잖아. " " 그건 내가 가질 그림이니까 그렇지요. 그래도 심심한건 심심한 거에요.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해봐요. " " 볼때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라고 하니 원래도 없는 이야기보따리가 남아날리가 있을지 생각해보라구." 말은 저렇게 시큰둥하게 해도 계속해서 칭얼대면 뭔 얘기라도 내놓을것임을 아는데 오늘은 정말 할말이 없는지 그림에만 열중이다. 뭔가 화두를 던져줘야 하나? " ........... 세이지와 처음 만났을때 얘기를 해봐요." 그래 좋은 주제다.... 둘이 처음 만났을때 웬지 굉장했을거 같지 않아? " ............................ 별 얘기거리가 없어. " " 정말 그러기에요? 그럼 거짓말로 지어서라도 해봐요. " " 거짓말로 지어 하는 얘기라면 뭐하러 들어? " " 아니 이래도 싫대고 저래도 싫대고 뭐가 그래요? 무슨 들려줘서 큰일나는 비밀도 아니고 ..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줄 아나? " " ...................... " " 아유, 됐어요, 됐어.... 얘기 해주면 내 얘기 쪼금 해줄라고 했는데.. " " ..................... " 생각없이 던진말이기도 했지만 웬지 꽤 효력이 있을 것 같은 미끼였다. 세이지나 한혁이나 나의 과거에 대해선 묻지 않지만 그래도 인간인데 조금은 궁금해하고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 .................... 그 말 지켜라..." " ... 하는 거 봐서.... " 한혁이 얼굴을 찌푸렸을 것 같다. 그렇지만 내 얼굴엔 장난기만 잔뜩 어린다. " ................. 그에 대해선 학교 들어가기 전에도 알고 있었어. " " 와, 그렇게 유명해요? 세이지가? " " 좋은 쪽으로 유명했던 거 아니니까 좋아하지 말라구. " 이그.. 인정머리 없게 말하기는.... " 나의 부모님은............. 경성에서도 꽤 유명한 세력가이지. 그것도 이케지마 밑에서 뿌리를 내린... " 처음 듣는 이야기라 나는 잠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혁의 부모님이 친일파라 그 이야기지? 그런데도 한혁은. " 난 열살때까지 조부와 함께 자랐는데 그 분은 애국심이 굉장한 분이었지. 그런데 부모님은 할아버님과 생각이 달랐어. 시대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거라면서 일본인 세력들과 왕래하기 시작했다." " ............ " " 부모님들은 결국 할아버님과 인연을 끊었지.........나는 그런 부모님들을..... " 무엇인가를 떠올렸는지 그의 흥분이 느껴져서 정신이 바짝 차려졌다. 그러나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 .................... " " 이케지마 가문에 대해선 자라면서 많이 듣게 되었다. 조선에 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정도였거든. 부모님들은 이케지마 가와의 친분을 두텁게 하고 싶었어. 그것이야말로 안전하게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는 길이었지." " ................. " " 열 여섯이었던가? 그 해 봄에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일본에 갔었다. 그 때 이케지마의 본가에 가보게 되었지. 처음에 그 굉장한 규모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집이라고 말하기엔 거의 황궁수준이더군. 문을 통과해도 통과해도 그 내부가 드러나지 않는. " " 세이지는 엄청 좋은 집에 살았는가 봐요. " " 좋다..라는 표현이 맞는걸까? 그곳을 감싸고 있는 위압적인 분위기..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어. " " 그래서 세이지를 만났어요? " " ..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세이지의 할아버지를 만났어. 거의 배알했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하여튼 그 영감도 꽤 인상적이더군. 날카로운 눈매하며. 뾰족하게 기른 턱수염도 생각나. " 턱수염따위는 웃긴다는 생각이 든다. " 아버지가 이케지마의 다른 사람들과 일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어른들의 허락하에 정원에 나가 있었지. 그곳의 정원은 굉장했어. 마치 한군데 어긋남도 없이 짜맞춘듯한 그 모습. 거대한 공간을 정말 빈틈하나 없이." 글쎄.. 그런표현만으론 상상이 잘안가는데... " 너무 완벽해서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맛은 없더군. 이케지마 가문은 그런 분위기야. 거대하고 정확하고 엄격한 틀... " " .............. 세이지는 언제 나와요..." " 자꾸 맥끊으면 이야기 안한다... " " 미안. " " 세이지는 그 때 만났어." " 그 정원에서? " " 그래." " 첫인상이 어땠나요? " " ........그떄의 첫인상은 ............ 이런자가 조선을 지배하려고 들면 끝장이다. ............였지...... " " .................. 이해불가...." " 나는 사람은 종의 자식이든 양반의 자식이든 그 근본은 다를바가 없다고 생각해왔었는데 그는 그 말을 무색케하더군." " ................ ? " " 외모를 볼때는 키가 상당히 컸는데 굉장히 잘생긴 얼굴이었어. 다만 눈매가 매서운게 그 할아버지를 꼭 빼닮았더군." 턱수염도 길렀을까? " 흰색으로 예장을 한채 정원의 연못가에 곧게 허리를 펴고 서서는 지그시 그 아래를 쳐다보고 있었어. 두 손은 뒷짐을 진채 마치 나보다 더 높은자는 없다는 듯 아주 오만한 표정으로. " " 당당한 표정으로라고 해줘요. 오만이 세이지하고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 " ................. " 잠시 침묵이 흐르는 걸로 보아 그가 노려보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 난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자신만의 생각에 골똘히 빠져있는 그에게서 풍기는 그 고고한 분위기와 기품, 시리도록 찬 기운 그리고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 절.대.적.인. 강.인.함. " 한혁이 세이지의 진가를 이제야 알아주는군. 흐믓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 '절대강자'라는 표현이 그야말로 적절했지. 난 단숨에 알아봤어. 저 소년이 바로 이케지마 겐자부로가 자신의 아들들도 제치고 인정한 후계자 이케지마 세이지다." " 멋있어요. " " .... 너는 그런 소리밖에 못하는군.... " 힐난의 목소리에 나는 깜짝놀랐다. " 내가 뭘요? " " 내가 그를 보자마자 느끼게 된 것은 하나의 공포심이었어. 이 소년은 오오쿠니, 아니 그 숙부인 겐자부로 이상의 인물이다. 조선에게 너무나 위험한 존재이다. " " 세이지는 오히려 조선을 돕고 있잖아요. "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그가 올바른 가치관의 소유자라고 한혁도 말하지 않았던가. " 그래... 그러나 그때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지. 너라는 변수가 등장하기 전이기도 했고. " 그의 말에 웃음기가 옅게 묻어나왔다. " 나를 걸고 넘어가지 말아요. " " 어째서? 세이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든 네가 이번 일에 굉장한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어. " " .......... 별로 그런 얘긴 하고 싶지 않아요.." " .... 대학에서 세이지를 다시 만났을때, 물론 그는 날 처음 본 것이지만, 난 그를 사로잡아보기로 결심했다. " 내 목소리가 꽤 진지했던지 그가 화제를 돌렸다. " 사로잡아요? " " 그라는 인간이 궁금했어. 강렬했던 첫인상을 그대로 증명할만한 사람인가. 아니면 다행히도 나의 직감이 잘못된 것인가. " " 결과는? " " 두개의 결말 다 맞기도 했고 틀리기도 했어. 그는 내 직감대로 굉장한 남자였지. 명석함, 정확한 판단력, 냉철한 이성으로 좌중을 압도하고 언제나 지지받았다." " ........... " " 그런데 그와 친분을 쌓게되고 그가 나를 좋아하게 되면 될수록 난 그 속에 있는 내면의 고민과 갈등을 보게 된거야. " " .......... 세이지의 진정한 모습이에요. " 그가 잠시의 침묵으로 동의했다. " 그의 냉철함속에 이케지마 가의 사람으로 보기힘든 따뜻한 심성이 숨겨져 있으리라곤 아무도 예상치 못했겠지. " " 그는 나에게 처음부터 따뜻했어요. " " ............. 세이지가 너를 처음 주웠을때를 이야기하지 않던가.. " ........ 줍다니.... 내가 무슨 물건인가? 그러나 나에 관한 이야기라 나는 귀를 더욱 바짝 세웠다. " 세이지가 떠나기 전 나를 찾아와 이런 얘기를 했어. 어느날 밤 밖에 나와 하늘을 바라보는데 뒷 동산쪽으로 별이 하나 떨어지더라는거야. 별의 빛이 너무나도 또렷해서 이상한 생각에 동산을 올랐다는군." " 설마 거기서 날 찾았단 건 아니겠죠? " " 왜 아니겠어? 거기 이상한 옷차림을 한 남자애가 하나 엎어져 있더라는군. " 설마 세이지가 그렇게 얘기했을리가. 내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렇지만 한혁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하다. " ................. 너무나 아름다워서 한순간에 빠져들었다고 그가 그러더군. 그가 그런말을 하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지. " 그의 웃음이 귀에 거슬렸다. 저것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 비. 웃. 음. " 왜 놀리고 난리야. 세이지보고 나 예뻐해달라고 한 적도 없고 당신한테도 그런 동의, 바란적 없어요!!" " ..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 " 뭐, 뭐라구요? " 툴툴거리던 입이 버벅거렸다. 뭘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야. 동의 바란적 없다는 걸 알았다구? " 네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고 ..... " 뜻밖의 말에 시간이 멈춘 것처럼.... 멍하게....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 이럴 떄의 한혁의 고요한 음성은 정말 듣기 좋지만.... 당신의 표정은 그려낼 수가 없잖아. " ... 네가 입벌리고 따따부따 쏘아대기 전까지는. " 짖궃은 목소리. 딱 멈춰선 심장. 이 망할놈의 인간이 끝까지 날 가지고 논다. 바닥에 얼굴을 박아버렸다. 그런데 화가 나기전에 맛보아지는 이유모를 실망감. 나 그래도 이 사람에게 조금은 잘보이고 싶었나보다. " 그림이나 잘그려요. 실물 그대로 그려서. 그림은 따따거리지 않을테니 다행이네." " 삐진 모양이군. 그런 건 여자들 단골이라구. " " 신경꺼요. " " 얼굴이나 들지. 그래야 그림을 그리지. " " 흥." 얼굴을 그 쪽으로 향하여 팔을 괴고 엎드렸다. 그가 바쁘게 손을 놀리는 소리가 들린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지금 그는 어떤 모습, 어떤 표정으로 어떤 나를 그리고 있을까...... " 너는 어디서 살다왔지? 네 과거를 얘기해주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건 세이지도 모르는 거 맞지? " 그가 잊지 않고 질문해온다. 글쎄 ... 뭐라고 대꾸해줘야 되나? 사실대로 다 말해도 이 사람이 소화해낼 수 있을까? 오히려 거짓말로 둘러댄다고 나무라는 건 아닌지... 햇살이 함빡 적셔오는 마루에 팔을 괴고 누운채 나름대로 고민했다. 꽤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던 중임에도 불구하고 한혁은 내가 대꾸가 없다는 이유로 내 어깨를 한번 툭 건드린다. 그 재촉에 힘을 얻은듯, 속에 있던 말들이 슬슬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할아버지가 한분 계셨어요. 비록 눈이 안보이시긴 했지만 남들보다 훨씬 많이 보고 생각하시는 분이었죠. 굉장히, 정말 진심으로 할아버지를 사랑했어요. 그런데... " " 그런데? " " 돌아가셨어요. " 그네를 밀어주시며 웃던 할아버지의 모습과 방안에 눕혀져 있던 싸늘했던 모습이 교차되어 떠오르면서 다시 한번 슬픔이 눈에 가득 고여왔다. 할아버지의 장례식도 보지 못하고 이곳에 와버렸어. " 그런데 돌아가신 날 밤에 우연히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나보니 세이지의 집이었어요. 그때부터에요. 눈이 보이지 않게 된것이. " " 예전엔 눈이 보였다는 건가? " " 응. 왜 지금 눈이 보이지 않는 건지 알수가 없지만 나름대로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정신적 충격을 받은 탓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 마치 언제라도 눈이 다시 보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말투로군. " 내 담담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가 나직히 읊조렸다. " 우습겠지만 그래요. 언젠간 집에도 돌아가고 눈도 뜨게 될 거라고 믿고 있어요. 할아버지가 그러셨거든요. 별은 반드시 여행후엔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고. " " ......... 그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거냐? " 머리를 괴고 있던 팔의 손목이 저려와서 손을 바닥에 내리 뻗었다. " 네. 근데 나 하나 중요한 거 얘기 안했어요. " " 그게 뭔데? " 상당히 진지하게 물어보는 그에게 진지하게 대답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 나, 미래에서 왔어요. " " ................. 확실히 평범하진 않군. " 말의 내용만큼이나 평범한 말투. 뭐냐. 이런 식의 반응은... 좀 더 대꾸해보는 걸 들어봐서 진지하게 진행할지 말지 결정해야겠네. " ................... 증거 하나 대봐. " 뭔가 더 대꾸가 필요하단 식의 표정을 짓고 있던 나에게 그가 던진 말은 그나마 현실적이라고 느껴져서 안심이 됐다. 적어도 이상한 놈이라고 몰아세우진 않는군. " 조선을 자주독립시키려는 당신들은 실패해요. 세이지가 도와줘도 말이에요. 왜냐면 일본은 그 전에 전쟁에 항복해버릴거거든. " 난 꽤나 의기양양했다. 지금 증명은 못해도 몇달 있으면 그도 이것이 진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가서 확인해도 늦지 않아.. 그러나 그의 침묵이 웬지 불안했다. 내가 뭐 실수했나? " ............................ 한혁씨? "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보았지만 잡히지가 않았다. " 당신들은... 이라고 말하지마. 너도 조선인이지 않아? 왜 조국의 미래에 대해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는거냐. 부끄럽지도 않은가? " 화난 음성. 그래.. 당신의 조선의 열혈청년..... 나는 ......... 이미 미래를 알고 있기에 심각한 건 아무것도 없는 방관자. 변명할 수는 있지만 그러기엔 당신에게 미안한 마음을 먼저 가져야 할 거 같다. " 말 실수했어요. 미안해요." 다시 한번 손을 내밀어 그를 더듬었다. 그의 가슴께가 만져진다. 다시 더듬어 그의 손을 찾았다. 세이지의 손처럼 길고 마디가 굵은 강인한 손가락. 그를 달래려 힘주어 잡았다. 확실히 나는 반성해야 한다. 이들에게는 현재가 살아있는 시간이고 아직 열려있는 미래이다. 내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그에게 함부로 미래를 정해주고 그의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말한 것일까. 그냥 웃고 넘기기엔 너무 큰 실언을 해버린 것 같다. " 미안해요. 진심으로." " ................ 괜찮아. 애초부터 제대로 생각이 박혀 있을 것 같다고 생각안했어. " 하는 말은 거슬렸지만 그 퉁명스러운 목소리 속에 화해의 기운이 담겨져 있어서 배시시 웃어버렸다. " 대신 다른 증거를 댈게요. 우리나라 말야 88년도에 올림픽 개최해요." " 조선이 올림픽을? " " 확인해보려면 꽤나 오래걸리겠지만.. 한 84년도 쯤엔 알게 되겠네. 그때되면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거 믿어주겠죠? " " 증거라고 보기엔 미흡하기 짝이 없군. 하여간 본인이 그렇게 우기니 참고 기다려 보도록 하지. " " 좋도록 해요. " " 단...... " 그가 운을 떼고 뜸을 들였다. " 세이지한테는 그런 얘기 하지 말라구. " " 왜요? 다짜고짜 나 정신병원에라도 데려갈 거 같아서요? " 웃으며 대꾸하는 나에게 그의 진지한 음성이 들렸다. " 그라면 덮어놓고 너를 믿을 거 같아서.... " " ................... " 얼굴이 뜨거워졌다. " 너는 어때? " " ... 뭐가요... " " 너도 그가 너를 믿는 만큼 그를 신뢰할 수 있어? " " ............... 아마도 ..." 조그맣게 중얼거렸지만 확실히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 그렇군." 역시 작게 들리는 그의 대꾸... 뭐가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9. 하루의 공상 눈이 안보이게 되면서 공상을 하게 되는 시간이 길어졌다. 특히 밤에는 방안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걸으며 운동이라도 하지 않으면 쉽게 잠들지 못할 정도여서 자리에 눕고도 여러 잡생각을 하기 일쑤였다. 하루종일 똑같은 어둠속은 어떤 상상을 펼쳐도 채색이 가능했지만 나는 진짜 색깔들이 보고 싶었다. 평소엔 왜 풀들의 푸르름을 지나치고 살았을까. 하늘의 오묘한 빛깔은 왜 자주 쳐다보지 못했을까. 따뜻한 봄햇살은 왜 바라보지 못했을까? 심지어 투명한 물의 빛깔도 왜 난 아무렇게 다루었던 것일까. 지난 날들 내가 아무 어려움 없이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그 색에 대한 희열들이 지금은 사무치는 아쉬움을 남겼다. 그나마 내가 버티고 있는 건 반드시 다시 보게 되리라는 희망과 기대. 맹목적인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아마 그런 믿음이 이런 급작스런 상황의 전개에도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적응할 수 있게 하는 것일 게다. 세이지... 내 공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그와 한혁이었다. 세이지에게 아무 일 없으리라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연락이 없기에 걱정이 되는 마음도 있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 꽤 자주 그의 고백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곤 했다. 매번 다른 대답이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내 마음의 혼란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었다. 급작스런 신변의 변화와 함께 눈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난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흔들리고 있었다. 비로소 시력이라는 것이 그 전까지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크게 깨달은 것이다. 매순간 거울 또는 타인의 행동을 통해 나 자신을 비춰보면서 나를 확인하고 깨닫는 작업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이곳에 와서 나는 나를 단 한번도 확인해 볼 수가 없었다. 마치 뜬 구름에 올라선듯 존재하지 않는 자의 몸을 가지고 돌아다닌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나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대답을 듣기를 바란다는 것은 세이지로선 간단할지 몰라도 나에겐 그렇지가 않았다. 대답을 '네' 로 할 경우 세이지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남자와의 사랑. 우선 허락부터 하고 보기엔 꽤나 험난해보인다. 동성애자들 이야기는 딴 세상 사람들의 것이라고만 여겨왔기에 내가 그런 상황에 직면하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해봤다. 또 세이지가 어떤 식으로까지의 관계를 받아들여달라는 건지도 정확히 모르겠다. 설마 육체적인 관계도 포함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런 복잡한 문제들은 세이지를 따라가면 된다. 그는 그만큼 믿음직스러우니까 뭐든 알아서 해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문제들은 더욱 크다. 내가 돌아가게 되면 세이지는 남겨진다. 감정의 꼬리를 남겨두는 것은 그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 것이 분명하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복종해야 하는 애절한 사랑따위는 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런 걸 세이지에게 경험하게 하고 싶지도 않다. ........... 부정적인 생각이 더 많구나.... 그럼 대답을 '아니오'로 할 경우 세이지의 사랑을 거부할 경우. 그가 어떤 식으로 나올 것인가. 우선은 그게 두렵다. 늘 나에게 다정했던 그인데 그의 성격대로 나의 거절을 순순히 인정해주고 물러설 건가? 그의 성격대로라.... 가끔 내가 세이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들때가 있다. 한혁의 말대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나에게 국한된 그의 일면일지 모른다. 나는 그의 다정한 목소리만을 듣고 지냈으니 오직 그것만이 그를 판단하는 전부였다. 그가 내 생각보다 훨씬 집요하고 차가운 사람이라면... 혹시 나에게 보복을? 서, 설마... 나로 인해 그의 나라까지 배신했는데 내가 싫다고 하면 우리나라 마구 짓밟는 거 아냐? 어쩌면 나에게 '철의 이케지마'라는 그의 별명을 사무치게 느끼게 해줄지도 몰라. 바보같은 생각이라 부정하면서도, 실감하지 못하는 한혁의 그에 대한 평가들이 좀처럼 완강한 부정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아무래도 나는 세이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못하는게 아닌가. ' 너도 그가 너를 믿는 만큼 그를 신뢰할 수 있어? ' 한혁의 물음에 그럴 수있다고 대답했건만... 문득 나는 큰 사실을 깨닫고 놀라버렸다. 가장 중요한 나의 마음은 어떻게 된 것인가? 나는 왜 그건 배제해둔 채 부수적인 것들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 나의 마음........ 나는 이케지마 세이지를 사랑하고 있나? .......... 사랑하고 있나? 10. 미끼 불청객이란 청하지 않았을 때 오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정말 반갑지 않다. " 유에상... 다시 보게 되어 반갑군요. " 꽤 청각이 예민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기척도 없이 들어와 그런말을 내뱉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 누구십니까? " 날 유에라고 부른다... ? 기억에 무언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되물어보았다. " 기억나실지 모르겠군요. 제 이름은 성재명입니다만. 이케지마와 한번 뵌적이 있죠." 목소리에 담긴 기운만으로도 느껴지는 바가 있다. 이 느글거림. 상대하기 싫은 거북함. 생각났다. 이사람. 세이지의 무례했던 친구. "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기엔 웬일이십니까? " 한혁과도 친분이 있기에 그 때문에 왔으리라고 추측하면서 친절하게 대꾸했다. 뭐라해도 세이지의 친구지 않은가. 그렇지만 왜 별채에까지 들어와 사람 신경 거슬리게 한담. 불만스런 표정이 드러나지 않게 일부러 미소로 굳은 얼굴을 포장했다. " 연락못받으셨습니까? 이케지마에게 당신을 데려와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 뭐라구요? " 뜻밖의 소식에 팽팽히 당기고 있던 경계의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 정말 세이지가 저를 데려오라고 했어요? " " 그렇습니다. " " 한혁씨는 아무말도 없었어요. " 그래, 그런 일이 있다면 세이지는 한혁에게 먼저 연락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어디 있지? 오늘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 " 한혁이도 이케지마와 함께 있습니다. 어젯밤에 경성으로 올라간 걸 모르셨나요? " " 아.. 그랬나요... " " 둘에게는 다른 급한 일이 있어서 제가 내려오게 됐습니다. 어서 간단히 채비하고 나오시죠.... 제가 도와드릴까요?" " 아니, 됐습니다. 채비랄 것도 없습니다. 잠시만 마루에 앉아 계세요. " 방으로 들어가 옷가지를 찾는 내 손은 평소보다 더 더듬거렸다. 세이지를 다시 만난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우선은 기쁜 마음이다. 내가 편안히 지내는 동안 그에겐 많은 일이 있었겠지. 무사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이 소식을 한혁에게 들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잠시 스치듯 만난 재명에게 별안간 들으니 더욱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나한테 인상이 좋지 않은 것처럼 보였는데 ... 겉옷을 매만지던 내 손이 잠시 멈추었다. .... 저 사람을 그냥 믿고 따라가도 좋은걸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작은 경보가 신경쓰이지 않다면 사실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저 사람은 한혁과도 친구. 나에게 어떤 해를 입히진 않겠지..라는 믿음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우선은 뭐든지 좋은 쪽으로 믿고 싶다. " 준비 다 되셨나요? " " 네. " 마루를 내려서자 그가 다가와 부축했다. 매캐한 담배냄새가 마치 이 사람의 첫인상을 대변하는 것처럼 풍겨와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 저 기둥 옆에 지팡이가 있어요. 건네주세요. " 웬만하면 쓰지 않던 지팡이도 꺼내 들었다. 경성까지 먼 길이 될 것 같으니 되도록이면 폐를 끼쳐선 안된다. " 집 앞에 차를 세워놓았습니다. 편안하게 모실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케지마 가의 사람이 아닙니까. " 그의 말끝에 묻어나는 웃음이 음모가의 그것처럼 불쾌하게 들렸다. 자꾸만 이어지는 불쾌한 감정들. 마음속에 켜지는 적신호... 그런데도 나는 천천히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마음의 경고를 무시한 것은 너무나도 어리석었던 짓임은 그리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차를 타고 한시간 쯤 갔을까. 갑자기 차가 섰다. 그리고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내가 뽑힐듯이 밖으로 끌어내어졌다. 험한 손길에 땅바닥에 팽개쳐버린 나는 모든 사태를 직감했다.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한숨과 함께 떠오르는 생각은 이렇게 여기저기로 휘둘려질 팔자인가보다... 하는 것이었다. 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 세계에 뚝 떨어지고 납치당하고 끌려가고 감금되고... " 일으켜 세워. 방에다 가두고 지켜라. 재명이 네가 잘 살펴. " " 알겠습니다. " 불쾌하다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이제는 완연하게 토악질이 날만큼 기분 나쁜 음색으로 들렸다. 억지로 끌어올려지고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들어간 곳은 어떤 남자가 말했던 그 방이겠지. 나는 던져넣는 그 기세에 눌리지 않고 얼른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벽에 기대어 앉았다. " 성재명씨. " " ........... " " 대답하세요. " " .......... " 대답안한다고 듣고 있는 걸 모를줄 아나? " 나 왜 속였어요. 그래도 당신을 믿고 따라왔는데. " " ............ " " 목적이 뭔지 말해줘요. 그래야 나도 대비를 하고 있죠. " " ............ " " ..... 성재명씨!! " 호되게 꾸짖듯 그의 이름을 소리높여 불렀을때 갑자기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머리채를 잡았다. 본의아니게 얼굴이 들려진다고 생각한 순간 짙게 풍기는 담배향기가 입술로 거칠게 얽혀들었다. 손을 들어 뜯어 말리려고 했지만 위에서 타누르는 그의 힘은 내가 당해내기 역부족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기에 내가 기습적으로 키스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매번 이렇게 당해야 하는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렇게 불쾌한 감정이 드는 사람은 더더욱!! 싫은 감정, 화난 감정. 당황함. 분노 ..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이 섞여서 온몸을 휘몰아쳤다. 토하고 싶어. 당신의 혀가 닿는 내 혀, 내 입술, 다 뽑아 버리고 싶다. " 헉... 헉... 헉.. " 얼굴이 흥분으로 빨갛게 달아오른채 숨을 토했다. " ..... 개새끼... " " .. 너도 그런 욕을 할 줄 아나? 하도 고상하게 웃고 있길래 그런 말은 입에도 담지 못할 줄 알았는데 말야. " 이건 한혁의 비웃음과는 다르다. 본질적으로 악랄해. " 그래도 차라리 욕을 하는게 낫군... 네 주제에 고상한 척, 도도한 척 남을 훈계하듯이 말하는 건 관두라구. 알아듣겠어? " 그의 손가락이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 포로 주제에 어떤 권리가 있다는 듯 말하지도 말구. 아주 건방진 짓이야. 잠자코 네 낭군 목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라구. " " .... 무. 무슨... 설마 한혁을? " 당황해서 얼빵하게 지껄였다. " .. 웬 헛소리냐... 이케지마를 말하는 거다... 설마 혹시 그사이 최한혁과 정분이 난게냐? .. 하긴 남자들 유혹하는 그 버릇이 어디간들 버리겠느냐만." 가슴이 턱 막혔다. 그의 모욕과 함께 내가 입에 올린 이름에 대한 실수... 내가 뭐를 생각한거지? " 뭐, 좋지... 나도 한번 맛보게 해줄테냐? 그 유명한 이케지마의 그거라면 나도 안아볼 의향이 있다." " 퉤! " 있는 힘껏 그에게 침을 뱉었다. " 당신이 나에게 흘려넣은 침, 하나도 삼키지 않았어. 도로 다 가져가!! " ' 철썩! ' 고개가 오른쪽으로 획 돌아갔다. 젊은 남자의 힘은 무지막지하다. 벌써부터 화끈거리는 뺨. " 지금은 물러가지만 밤이 되길 기다려라. 침이 아니라 더한 것도 넣어주마. 네 그 도도한 자존심이 꺾이나 안꺾이나 보자." ' 쾅 ' 문짝이 부숴지지 않고 제대로 붙어있을까 의심스러울만큼 큰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오싹한 기운이 등골을 '쉭'하고 스쳐갔다. 아무래도 이번은 쉬울 것 같지 않다라는 예감이 거의 적중할 듯이 온 몸에 와닿았다. 나는 이미 밤인데 더 무서운 밤이 기다리고 있는 걸까? 두려운 마음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달갑지 않게 찾아온 것은 잠의 여신이었다. 오랜만의 감정소모로 다닳은 건전지처럼 맥을 못추고 바닥에 기절하듯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잠을 자도 그것이 숙면일리 없다. 계속해서 찾아오는 악몽. 되풀이 되는 악몽. 어렴풋이 보이는 두개의 그림자.. 서서 웃고 있는 사람은 처음보는 사람.. 그러나 나는 알아차린다. 그의 입에 걸린 잔인한 미소로. 오늘 나를 속여 이곳까지 데려온 자이다. 그 앞에 무릎꿇린 사람은.... 세이지? 세이지 당신이야? 너무 반가워서 달려가 그를 안으려 했다. 그런데 성재명 그 사람이 내 눈앞에 세이지의 목을 단칼에 쳐낸다.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는 세이지의 목.... 어쩌면 저리도 간단히! 저리도 허무하게! 안돼! 안돼! 세이지! 세이지! 달려가 그의 얼굴을 끌어 안았다. 온 몸을 적시고도 끝나지 않고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피.... 굳게 감긴 그의 눈에서 핏물이 흐른다. 세이지,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네가 죽인거야.' 고개를 들었다. 성재명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의 얼굴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저 얼굴은 한혁? 나를 나무라는 얼굴로 또박또박하게 그가 말한다. ' 네가 죽인거야. ' 한혁, 아니야. 성재명이 그랬어.. 그가 그런거야.. 고개 젓지마. 싫어. 그런 표정 짓지마..왜그래.. 왜그래.. 절박한 심정이 되어 그를 애원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 또한 단호하다. ' 네가 ... 죽이게 될 거야. ' 아냐. 아냐. 아니라니까!! ' 그 전에 그의 눈을 가져. ' 한혁의 말이 또렷하게 들린 순간 핏물을 흘리고 있던 세이지의 눈이 번쩍 떠졌다. " 아아악!!!" 비명을 지르고 깨어나보니 여전히 캄캄한 어둠이었다. 무서워. 무서워.. 이토록 어둠이 무섭다고 여겨진것은 처음이었다. 안보이는 눈이 너무 답답해서 무언가로 눈을 파내고 싶었다. 내 앞을 가리는 이 검은 장막을 걷어내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주위를 더듬었다. 손에 짚히는 것은 매끈한 방바닥 뿐... 뭔가가 있을거야. 뭔가가 있을거야. 질질 기다시피 방바닥을 쓸어보았다. 절망감에까지 사로잡혀 공포감이 극도에 다다른 순간 내 손안에 잡히는 그 무엇. 무엇인지 모르나 길쭉하고 단단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난 망설임없이 눈에다 꽂으려 팔을 거세게 들어올렸다. '탁!!' " 뭐하는 짓이야!! 진정해. " 귓가에 급하게 들려오는 숨죽인 목소리. 거세게 뿌리쳐진 손목의 아픔이 강렬해서 다른 한손으로 손목을 움켜잡았다. " 시, 싫어... 싫어!! " 밤에 찾아오겠다는 성재명의 말이 떠오르면서 나는 몸서리처질만큼의 혐오감과 공포심에 휩쌓였다. 저 뱀과 같은 사내에게 안기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단호한 결심이 내 얼굴에 스쳐지나갔다. " 윽.." 그러나 혀를 깨물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을때 깨물린 것은 다른 무엇이었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그 무엇은 나의 피가 아니었다. " ... 경서.. 왜 이러는 거야..." 누, 누구지...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 하, 한혁....? " 그라면 좋겠다.. 그였으면 좋겠다.. 제발 그라면 좋겠어!! " 그래, 나야. 도대체 왜 이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어.. " 아....! 그 순간에 느낀 안도감이라는 것은 지금껏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제서야 내 눈을 가린 어둠이 차츰 공포와 절망감을 걷어가고 순수한 검정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무섭지 않다.. 무섭지 않아.. 한혁이 곁에 있다. 나는 한혁의 목을 세게 끌어 안았다. 놓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야. ' 진짜 어둠'은 언제 다시 나를 덮칠지 몰라... ".... 어서 나를 여기서 데리고 나가줘..." 지친 듯한 음성이 내 입에서 작게 흘러나오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느껴졌다. " 그래, 나를 믿고 안심해." 그의 그 말한마디가 너무나도 절대적으로 다가왔다. 11. 최한혁 한혁과 그의 일행이 나를 데리고 안가에 도착한 것은 약 몇시간 후였다. 성재명등과의 별다른 마찰이 없이 무사히 빠져나온 것에 대해선 그가 나에게 오기 전 어떤 다툼이 있었는지, 아니면 몰래 잘 빠져 나온건지 나로선 알바가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한혁의 보호 아래 안전하다는 것 뿐이었다. 그가 지친 나를 푹신한 요에 눕혔을때 탈출에의 긴장에서 놓여 기진맥진이었다.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겨주는 한혁의 손은 너무나도 다정해서 나는 완벽하게 보호받는 아기와도 같았다. " 그들이 너에게 무슨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나? " 걱정스럽게 물어보는 질문에 토할 것 같았던 키스가 생각났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 어떻게 알고 나를 찾았어요? " " 소난이가 너를 데려간 자를 얼핏 보았더군. 재명이인줄 단숨에 알았다. " " 그런데 왜 그가 나를 납치했죠? " " 재명이가 속한 단체는 독립운동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좀 과격한 자들이지. 우리하고는 성격도 방법도 달라. 우리는 세이지를 이용하려고 한거지만 그들은 제거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거야." " 세, 세이지는 무사한가요? " 화들짝 놀란 내가 다급히 물었지만 한혁의 대답이 곧장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보이지 않는 눈을 더욱 커다랗게 떴다. " 말해줘요! 그가 무사해요?! " " ............... 그는 경성에 와있다. 곧 만나게 될거야. " 조용히 들려오는 음성. " 무사하군요! " 저절로 안도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세이지가 무사하다. 게다가 경성에 와있어!! " 여기는 어디죠? 여기도 경성인가요? " " 그래. 네가 처음에 끌려왔던 곳이야. 대장님이 널 데려오라고 하신 걸 보면 세이지와 거래가 끝난 모양이다." " ........... 돌아가는 거군요." " .........그래........ 그에게로.... " 그의 말끝이 너무나도 담담했다. 그에게.... 세이지에게로 돌아간다.... 잠시의 침묵속에 그의 마지막 말한마디가 던져주는 그 묘한 담담함을 천천히 되씹었다. 내가 세이지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한혁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 한달도 넘게 그와 지내면서 받았던 따뜻한 느낌들. 비록 하나의 유배생활이었지만 그렇게 생각되지 않을만큼 마음과 몸, 모든 것이 평화로왔다. 하루를 이루는 작은 순간순간들이 즐겁고 만족스러웠는데..... 세이지의 다정함과는 뭔가 다른 그의 느낌...그것들을 느끼며 지내온 시간들.... 한혁은 그 시간들을 어떤 식으로 평가하고 있는거지? 또박또박 책 읽던 .... 책 내용에 스스로 도취되어 계몽운동에 대해 뜨겁게 열변하던 ..... 이르게 핀 금잔화의 독특한 향을 가르쳐주던...... 그의 목소리들 .... 그리고 사각사각.. 기분좋게 들리는 그의 스케치 소리.... 나는 너무나도 아련하게 행복한 추억이 되어서 남았는데... 한혁에게 그것은 담담함으로 평가되는 것들인가? 내 마음에 드는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 섭섭함 ...... 서운함..... ? " 오늘 고된 일을 겪었으니 푹 쉬고 내일 대장님을 뵙자." 그가 일어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나는 당황하여 그를 잡았다. " 오늘만큼은 그냥 옆에서 같이 자요.... 나 악몽을 꿔서 정말 무서워요." 당신과 같이 지내게 될 마지막 밤이기에 아껴서 보내고 싶다는 말은 차마 입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의 팔을 움켜잡은 손가락을 더욱 강하게 쥐자 그가 다시 주저 앉았다. 나는 안심의 미소를 지었다. " 무슨 악몽을 꿨지? " 굴러떨어지는 세이지의 목. 부릅떠지는 세이지의 핏물이 가득찬 눈동자.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 ......... 이 옆으로 편히 누워요... 당신 손을 잡고 있어야 안심하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벽쪽으로 붙어 누우며 빈자리를 두드렸다. 잠시 후 버석거리며 옆에 그가 누웠다. 나는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들어 엄마가 늘 해주듯 그의 몸을 함께 덮어주었다. 더욱 진해지는 향내... 이 향도 이젠 자주 맡지 못하겠지. 나는 나도 모르게 크게 향을 들이 마셨다. 폐에까지 가득 들어차는 듯한 향.. 그의 손을 더듬어 찾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따뜻하고 강인한 느낌에 한혁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었다. " 이제 꿈 이야기를 해봐.. 무엇이 너를 그렇게 겁에 질리게 했어? " 다시 떠오르는 무서운 영상들.... " 세이지가 성재명에게 목이 잘렸어요. 말릴 틈도 없이 한번에... 그런데 성재명의 얼굴이 당신 얼굴로 바뀌면서 나를 엄하게 나무랐어." " ............ " " 내가 죽인거라고.. 세이지는 내가 죽인거라고..... 내가 아니라고 울면서 매달렸더니... 내가 죽이게 될거래... " " ............. " " ....... 그리고 나에게 세이지의 눈을 가지라고 했어요....그랬더니 세이지의 눈이 번쩍 떠지면서......... " " .............. " " ............. 정말 무서웠어요... 어둠 그 이상으로... 깨고 나서도 내 앞을 가리는 어둠이 너무나도 무서웠어... " 그리고 당신이 온 후 나를 무섭게 한 어둠이 걷혔지..... 지금 내 눈앞을 가린 어둠은 따뜻해.... 내가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를 염려하는 그의 마음이 손을 타고, 다시 팔을 타고 가슴을 타고...심장까지 전해들어왔다. " ............... 꿈에서 본 내 얼굴은 어땠지? 잘생겼나? " 그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웃으며 물었다. " 어? "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이 어땠지? " 뚜렷이 생각이 안나는데? " " 뭐야? 그럼 난줄은 어떻게 알았어?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면서." " 그냥 그렇게 느꼈어요. 의심할여지없이." " 후후... 엉터리 꿈이로군... " " 엉터리라니... 얼마나 무서웠는데.. 원래 꿈이란 그런거에요. 추상적이고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구..." " 엉터리라니까.." 정색하듯 딱잘라 말하는 그. " 칫! " " 약오르면 손 놓지 그래? " " ... 싫어욧! " 일부러 그의 손을 더 꼭 쥐었다. 미소가 자연스레 지어질정도로 마음이 따뜻해져왔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초코파이 선전처럼 '정'이 그와 나 사이에 흐르고 있는 걸까. 이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은..... 이렇게 좋은데.. 시간이 흐르면 이 느낌들이 언제그랬냐는 듯 이질적인 것으로 변해있을까...? 어떤 친구든 잠시의 순간을 밀도있게 함께 지내다보면 긴밀히 흐르는 유대감을 느끼게된다. 그렇지만 헤어져서 오랫동안 못보게 되면 그런 느낌들은 잊어버려 다시 만나게되도 서먹하게 되버려.. 한혁, 당신을 세이지에게로 돌아간 상태에서 다시 보게 된다면 이 느낌이 그대로일까...? 그대로일까? 이 느낌이 확실하다고 믿는 것은 지금 뿐인가? 오직 오늘밤이 끝나기 전까지? " ......... 당신이... 좋은 것 같아요... "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는 미동도 없고 대꾸도 없지만 들어도 상관없고 못들어도 상관없다. " 처음엔 정말 마음에 안들었는데.......... " " .................... " " ................... " " ................... " " ................... " " ................... 그건 ...... " " ..? " 그의 말을 귀를 세워 기다렸다. " ........... 피차일반이야... " " 풋! 좀 더 잘 말해볼순 없겠어요? " 끅끅거리며 웃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의 말 한마디가 품고 있는 따뜻한 정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의 가슴에 기대어 잠이 들면서 다시 한번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좋아요..... 12. 그에게 돌아가기까지에는. 얼마간 덜컹거리던 차의 움직임이 훨씬 유연해졌다. 경성 시내로라도 진입하게 된 것일까? 내 마음은 세이지를 다시 만나게 된다는 기대로 부풀어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두고 온 한혁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차 문을 닫아주면서 ' 다음에 세이지와 함께 보자' 라고 웃으며 말한 그의 목소리가 자꾸만 머릿속에 맴도는 것이 웬지 모르게 불안함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분명 그의 목소리는 밝았는데 나의 잠재의식은 무엇을 예지하려는 걸까. 불행따윈 바라지 않는데... 웬지 불안해... 여러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을 무렵 차가 멈췄다. 아.. 드디어 도착이구나. 세이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흥분한 기색이 완연해서 문을 더듬어 열었다. 내려서기도 전에 누군가 얼른 내 팔을 잡고 부축했다. " 세이지? " 무슨 확신으로 그렇게 물었는진 모르겠지만 내 얼굴은 웃음꽃이 만발했다. " 아닙니다. 저는 일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기다리는 분이 계시니 가시지요. " 어색한 억양. 일본 사람이다. 나는 만발하던 웃음꽃을 접고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약간은 실망하고 있었다. 세이지라면 내가 차에서 내리기도 무섭게 마중나와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꽤 한참을 걷는다고 생각했을때 드디어 멈추고 방문이 앞에서 열렸다. 조심스럽게 방안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았을때 앞쪽 약간 멀리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잘 왔소. 민상." 처음 듣는 목소리. 나이 든 남자의 굵직하고 힘찬 목소리에 깜짝놀란 나는 고개를 들어 소리나는 쪽에 고정시켰다. " 놀랐겠군. 세이지를 만나는 줄 알고 왔을텐데. " " 누, 누구시죠? " 예상치 못한 상황의 전개에 적지 않게 당황한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나는 이케지마 겐자부로. 세이지의 숙부이자 양아버지요." 그야말로 멍해져서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정말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이케지마 겐자부로? " 우리나라를 못살게 군다던 그 나쁜.... " 당황해서 얼른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실언을 한 후였다. 정말 숨 졸이는 정적이 흘렀다. 데려가서 목을 치라고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 핫핫핫!! 자네는 바보가 아니면 조선에서 가장 용감한 자겠군. 그래 그렇소. 내가 조선을 못살게 구는 나쁜 그 놈이라오. " 뜻밖의 호탕한 웃음에 내가 더 놀라버렸다.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 그러나 그거 아오? 강자의 살육과 지배, 갈등같은 것은 사람들이 있는 곳엔 늘 있어왔지. 그것은 누가 나쁘고 선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자연스러운 일이라오." " ............ " " 나를 나쁜 놈이라고 욕하고 있겠지만 우리가 죽은 후에 신들이 우리의 잘잘못을 심판할거 같은가? 그건 틀린 생각이야.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은 신이 부여한 것이기 때문이지. " " ............ " " 나는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동참한 것 뿐이라네. 그렇다면 이왕이면 강자로서가 옳지 않겠나? " " 궤변입니다. 갈등과 지배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기때문에 그걸 유도해낸다는 것은! " 강자의 오만한 자기합리화에 화가 나서 언성이 높아졌다. " 그것이 어떻게 궤변인가. 좀더 세계를 보는 눈을 넓히는 게 어떻겠나. 자네가 사는 시간은 찰나이며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라네. 그것이 일찍 당겨져도 그 역시 찰나에 불과하지." " .......... " " 인류의 유지에 개개인이나 약자의 삶과 죽음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네... 오히려 발전은 사람들의 피를 딛고 이루어지지. 그렇게 기울어짐없이 균형이 맞추어지면 되는거야." " 사람들의 행복없이 어떻게 인류의 유지가 의미있을수 있나요? 개개인의 행복을 무시하는 건 결국 인간 자체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겁니다." " ................. " " ............. 세이지는 어디 있습니까? "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침묵을 틈타 던졌다. " .. 분명한 건 여기 없다는 것이지.. 그는 자네가 나에게 와있는것도 모른다." " 그럼, 어떻게.. " 당황하고 말았다. 한혁도 내가 세이지에게로 가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일이지? " 잘 생각해보게. 내가 자네의 존재의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있었을 것 같나? " " ........! " " 세이지가 자네 때문에 상하이쪽에 자본과 군수물자를 대준것을 알고 있다. 물론 모두 자네 때문이라곤 볼 수 없겠지. 녀석의 번민을 나도 알고 있었어. 그런 점이 나를 묘하게 매혹시켰거든. " " ........" " 그렇지만 그가 이케지마의 이름과 나라를 놓아버리게 될 거라곤 예상치못했다. 자네라는 인물은 내게 꽤 큰 변수였어. " " ........ " " 자네.... 세이지를 사랑하나? " 그의 고백에 대한 대답을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본인도 아닌 사람에게 하게 될줄 누가 알았을까. 그러나 나의 대답을 재촉하는 저 침묵은 뜻밖의 질문에 당황해버린 나를 더욱 막다른 곳에 몰아넣고 있었다.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질문이다. 나는 세이지를 사랑하나? 모든 것을 배제한 오직 단 하나의 것... 나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면... 나의 마음은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세이지 이케지마.... 당신인가? ..........................나의 마음은.... 아닌 것 같아..... " .......... 세이지를 진심으로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 사랑은.... 아닙니다..." 마지막 말을 토해내는 그 여운이 너무나도 씁쓸하고 아팠다. 이런 식으로 대답하게 만드는 나의 마음이 너무 싫어. " 사랑이 아니라고.. 확신하는가? " 마치 확인사살을 하듯 들려오는 질문. " ..네.. " " 내가 왜 이런 질문들을 하는지 아는가? " "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날 죽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 후후... 나에 대해 대단히 오해하고 있군. 내가 무슨 살인귀라도 되는 줄 아는가? 자네를 죽여서 세이지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을거라곤 생각하지 않네. 글쎄 화풀이로 죽일수는 있겠지."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그의 말이 오히려 오싹하게 들렸다. 그라면 정말 아무 망설임없이 나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다. " 그가 어렸을 때부터 나는 그가 가지고 있던 제왕으로서의 눈빛을 단숨에 알아봤지. 나는 그것을 실현시켜주는 것이 그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네. " " ................ " "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다네.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줄 생각이네. " " ............ 당신은 굉장히 .... 짐작하기 어려운 사람이군요..." " 자네야말로 거침이 없군... 그래.. 아름다운 꽃에는 가시가 있지.. " " ........ " " 애석한 건 내가 세이지를 놓아줘도 그가 원하는 걸 가질 수 없다는 데 있는 것 같군.. 그래.. 그건 세이지의 운명이겠지.. " " .. 개인의 행복을 무시하면서 그의 행복은 생각하는군요... " " ............... 그렇게 말하면 할말은 없군..." 웃음기 섞인 그의 대답은 내용과 달리 전혀 긍정하는 느낌이 아니었지만 나는 뭐라고 대꾸하지 않았다. " 그러나 조심하게. 자신이 아끼며 소중하게 기른 새라도 자신의 의지에 배반하면 얼마든지 잔인하게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 " !! " 그가 웃으며 말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만큼 오싹한 느낌이 등을 타고 흘렀다. " 자, 그럼 세이지의 운을 시험해보세... 그애가 자기 운명에 놀아나는 바보가 될지 아니면 예상치 못한 또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될지.. " " 그게 무슨 뜻인지..." " 자네가 그애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댓가가 있어야 되지 않겠나.. 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동안 나는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몸이 단숨에 흐트러지며 바닥에 철썩 앉았다. 내가 세이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치뤄야 할 댓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저 사람은.... 세이지의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언제든지 짓밟을수도 있는 사람이야.. 무서운 사람이야.. 저사람.... 누군가 나의 팔을 끌어올렸다. 억지로 일으켜진채 어딘가로 인도되어가면서 나는 불안한 예감을 지울수가 없었다. 13. 매혹 그리고 파멸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사삭거리는 날렵한 발걸음소리... 낯선곳에 끌려와 잠을 못 이루고 있던 나에게 작은 소리조차도 민감하던 차에 별안간의 소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히기에 충분했다. 무슨 일일까. 누군가 침입한 것 같다. 누가.. ? 혹시.....! 방바닥을 기어가 문에 기대 귀를 귀울였다. 순간 벌컥 열리는 문. 너무나도 놀라 뒤로 콰당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 경서!! " " 한, 한혁? "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듣기 좋은 울림이 급하게 외쳐졌을때 나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 도대체. 여기 어떻게... " " 긴말할 시간 없어.. 어서 업혀. " 그에게 억지로 업히다시피 한 나는 자초지종을 묻고 싶었지만 그가 너무나 서두르고 있었다. 그는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꽤 무거울 법도 한데 그는 정신없이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쫓는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발자국소리는 점점더 크게 들려왔다. 갑자기 한혁이 멈춰서 크게 숨을 몰아쉬었을때 나는 우리가 포위됐음을 알아차렸다. " 제기랄..." 횃불의 후끈한 열기가 온통 주위를 감쌌다. " 최상. 경서씨를 내려놓으십시오. 당신은 아무데도 가지 못합니다. " 여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 누구 맘대로 나를 잡아놓겠다는 거냐." " 그렇게 자신만만해할 입장이 아니신 것 같은데요. " 여자의 목소리에 웃음이 묻어났다. " 주인님이 최상을 만나뵙고 하십니다. 이케지마님은 왜 최상이 이런 난동을 부리시는지 이해하고 있지 못하십니다. 민상이나 최상이나 작은 주인님의 친구분이 아니십니까." " .............. " 한혁이 침묵했다. " ... 분명 그렇게 말했나? 우리가 세이지의 친구라고? " " 네.. 친구분의 집에 왔으면 그 집의 주인을 먼저 뵙는게 예의인것 같은데요. 최상은 민상을 먼저 찾는군요. " 한혁은 날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즉시 양쪽팔을 누가 부축하여 세우는 것이 느껴졌다. " 좋아. 주인을 만나겠오. 안내하시오." " 한혁... " " 걱정하지마. 우리를 해칠 것 같지 않아. 다녀올테니 기다리고 있어. " 작게 속삭이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에 나는 다시 방으로 옮겨졌기에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수 없었다. 겐자부로가 한혁에게 무슨 말을 할까. 하여간... 해를 입히지는 않겠지? 부디 무사해야 할텐데... 그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루다 선잠을 든게 언제쯤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 한혁은 내 곁에 돌아와 있었다. " 도대체 어떻게 된거에요. 내가 여기 있는진 또 어떻게 알았어? 겐자부로가 무슨 말을 했죠? " 몰아치듯 질문해놓고 나도 아차했지만 그는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세이지에게 돌아가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한혁이 없는 사이 겐자부로는 대장 등 수뇌들에게 연락을 해왔고 독립전쟁에 대한 지지와 원조 대신에 나를 넘길 것을 원했다. 세이지의 도움만으론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그들은 겐자부로라는 거대한 산이 나선 것을 반갑게 여겼고 세이지와의 약속은 어겨도 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어차피 문제가 생겨도 겐자부로가 세이지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대장은 평소 한혁과 세이지 사이에 친분이 있는 것을 생각해 그를 끌어들이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당일까지 한혁만은 겐자부로와의 거래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떠난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한혁은 겐자부로가 세이지의 약점이 되버린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구하러 온 것이다. 그러나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평소에 배로 보강된 보초들에게 쉽게 들키고 말았고 더욱이 나를 찾느라 시간이 더욱 지체된 탓에 결국 잡히고 말았다. 나는 그가 나를 걱정해 목숨을 걸고 침입했다는 것에 감동받았다. 한혁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는 죽을 것도 각오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도 겐자부로에 대해 그가 날 죽일거라고 오해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 겐자부로가 어떤 이야기를 했어요? " " 세이지가 나에 대해 여러번 이야기 했다더군. 그리고... " " 그리고 뭐? " " ....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와 세이지를 불러올 때까지 머물러달래.." 겐자부로와는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의 얼버무림을 그냥 지나쳤다. 나에겐 말할 수 없는 또다른 이야기가 있겠지... " ..... 소란피운것에 대해선 아무말도 없었구? " " 그래.. 그는 다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척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 " .. 그 사람 굉장히 특이하지요 ?" " 세이지의 이성적이고 냉정한 점만 모아놓은 사람 같아. 마치 세이지의 절반처럼..." 세이지의 절반... ? 그래서 그가 세이지를 원하는 것인가? " 그가 모른척하면 나도 모른척해야지.. 세이지가 돌아오면 나갈 방법을 강구해봐야겠어. 어쨌든 확실한 건 그가 우리를 죽이지는 않을거라는 거야." 그 사실만큼은 나도 일찍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더 불안한 점이었다. 겐자부로는 상식이 통하지 않을 사람. 나 때문에 한혁이나 세이지가 어려움에 빠지게 될지도 몰라. 그러나 한혁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세이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에 후회가 들진 않았다. 내가 이기적인 걸까? " ....당신이 와서 기뻐요. " 그쪽을 향해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말했다.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역시 정적.... 나혼자 활짝 웃었다. 나는 다른 특별한 무엇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 좋아서 그 마음을 계속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뿐. 당신도 내가 좋나요? 웃음속에 이런 말들이 담긴 줄 한혁이 알기나 할까 모르겠다. " 그만 자라.." 라고 짧게 말을 던지고 나간 것을 보면.... 우리는 이케지마의 손님들로 대접받았다. 한혁과는 옆방을 쓰면서 원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었고 단 집안을 함부로 돌아다니는 일만큼은 금지되었다. 나는 그럴래야 그럴수도 없었지만 한혁은 몰래 여기저기 살피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에 퇴로를 확인해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로서는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의외로 즐거운 날들이 이어졌다. 이케지마가의 대우는 최상이었고 아무런 불편없이 지낼수 있었는데다가 한혁도 옆에 있었다. 여름에 접어들면서 햇살이 뜨거워졌지만 그만큼 생동감이 있었다. 식물들은 하루사이에 부쩍부쩍 자랐고 향이 진해졌다. 물은 더욱 시원하고 달았으며 한혁을 스치고 온 밤바람은 향기로웠다. 이곳에 와서도 한혁은 나를 스케치하는 일을 계속했다. 사각거리는 소리는 다시 듣는 건 나로서도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 한혁.. 나를 그리는 게 좋아요? " 우두커니 앉아 있기가 지루해진 내가 물어도 그는 묵묵부답 그리기에만 열중했다. " 대답안해주면 이불 뒤집어쓰고있겠어요. " " ........ 그리는 게 좋지않으면 그릴 이유가 없잖아..." 어쩔 수없이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 " ... 내가 좋아서 그린다는 거에요. 아님 그리는 것 자체가 좋다는 거에요? " " ............ " " ......... 자꾸 씹을래요? " " ....... ? 씹는다고? 뭘? " " 왜 내 말을 무시하냐구요. 얼른 대답해요. " " 자꾸 시끄럽게 굴지말고 가만히 있어. 거의 다 그려가니까. " 귀찮다는 듯 대꾸하는 한혁의 목소리도 사실 듣기 좋았지만 나는 삐진척 팽하고 뒤돌아 앉았다. 그렇지만 아무 대꾸도 없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았다. " 뭐에요? 나 안그려도 돼요?" " 음.. 뒷모습도 괜찮은 것 같아서.. 그것도 그리려고... " " 뭐라구요? 내 참... 그렇게 그리고 싶으면 내 발이나 그려요. 자요.. " 그를 향해 냅다 발을 내밀었다. 사각거리는 소리.... " 설마 진짜 발그려요?" " 그래. " " 대답한번 간결하군요.. 내가 졌어요. 아까 포즈 다시 취할테니까 그거 마저 그려요.." " .... 발도 예뻐... " 그 조그만 중얼거림에 얼굴이 순식간에 발갛게 달아올랐다. 좋아한다는 말보다 더 낯부끄러운 말들을 늘어놓는 기분이다. " 내 앞모습도 예쁘고, 뒷모습도 괜찮고, 발도 예쁘다니.. 내가 그렇게 좋아요? 좋으면 말로하지. 구박하기는. " " ...피차일반..." 쑥쓰러운 마음에 쏘아붙였는데 역시 간결하게 대꾸하는 한혁의 향내나는 음성... 그의 말 뒤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혁의 눈길은 내 머리카락에서부터 눈썹, 눈, 코, 입. 어깨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고 있겠지. 시선은 느껴지지만 나는 되돌릴 수가 없다. 멍하니 엉뚱한 곳에 시선을 던져놓을 뿐. " .......... 한혁..... 좋아한다고 다 사랑이 아니지요? " 마치 그에게 묻지 않는 것처럼 허공에 질문을 던졌다. " .... 그래... " 나직한 음성.. " 그럼 언제 사랑이라고 알수 있을까요? " " .... 자신의 마음이 알아차리겠지.." " .............. 한혁.. 나에게 와봐요.... "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연필이 바닥을 구른다. 내 앞에서 짙어지는 향... " ........... 내가 미래에서 왔다고 했죠? " " 그래.. " " 늘 생각해왔어요. 무엇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여행의 목적이 뭘까하구요... " " ............. " " 나는 그것을 사람과의 인연이라고 결론지었어요... 저같이 소소한 인물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바로 그런 것이니까요. " " ............. " " 나는 그 인연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요... 그러나 단 하나의 걱정은..." 단 하나의 걱정은......... " 여행의 목적을 알게 된 순간 되돌아가버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 " 그토록 바래온 집으로의 길인데... 그 방법을 짐작하면서도 쉽게 결심을 내리지 못하게 해.... "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 조용한 음성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 반드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별의 운명이자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죠.... " " ................ " " 내가 속한 세계에 돌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요......... 돌아가셨지만 할아버지도 보고 싶고...... " 향이 고요하게 맴돌았다. " .... 그럼 여행의 목적을 찾아... 그렇지 않으면 떠나오게 된 의미가 없잖아...." " ........... " " .......... "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지 알고 있어.... 당신도 내가 아닐까 생각하는 거지? 당신이 기다려온 사람이... 그러나 내 생각과 다르게 그는 몸을 일으켰다. 멀어지는 한혁.. 나는 당황해서 그를 끌어당겨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 .. 확인하게 해줘요.. " " ............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 " 알잖아요!! 나는 당신이 내 여행의 목적인지 알고 싶은거야! " " ................ 나는 그에게서 너를 지켜달라고 부탁받았어... " '그' 가 누구인지 서로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당신은 오해하고 있는거야. 나는 세이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마음이 알고 있어. " ............ 세이지를 사랑하지 않아.... 진심으로 좋아해! 그렇지만 사랑이 아냐. 당신도 말했잖아.. 마음이 알아차릴거라고." " 그건 나에 대해 한 말이었어...착각해선 안돼... " '철썩' 온힘을 다하여 그를 올려쳤는데 공교롭게도 정확하게 뺨을 때렸다. 그러나 그런 것에 개의치않을 만큼 난 흥분해버렸다. " 당신이 내마음까지 조정하려 하지마. 어떤 것이 진심인지는 내가 더 잘 알아!" " 착각하지 마!! 너는 세이지를 사랑해 !! " " 그렇게 잘 아는 당신은....... 당신은 어떤거야.......... 나를 사랑해? " " ............... 너는 지금 나에게 세이지를 배신하라고 하는 거냐... " 그의 목소리 속 침통함을 들었다. 나는 절망적이 되었다. " 한혁.... " " 무엇이 세이지에게 가장 큰 타격이 될지 알고 있어.. 그런데도 너는 내가 너에게 진심을... ! " 그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니, 서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서로 사이에 흐르는 고요함 후에 그가 조용히 나의 머리를 팔로 감싸 안아주었다. 내 머리칼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는 그.. 눈물방울이 내 뺨을 굴렀다. " 세이지를 배신하지 마... 그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넌 몰라... 배신당하면 그 절망이 너무 커 너는 물론 자신까지 파멸시킬지 모른다. " " ................ 흑..흑흑... " " ................... 내가 먼저 널 만났더라면..........." " .....한혁.. 한혁..... " " .............!! " 순간 한혁의 온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으나 그 의미를 몰랐다. 그리하여 나는 가장 최악의 순간에 해서는 안될 말을 하고 말았다. " ......... 당신을 사랑해요.. " ".................... 한혁....? " 서서히 떨어져 나가는 한혁의 몸.... 머리를 감싸고 있던 팔도 풀려나가고...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일어서는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 세이지...... " 한혁의 음성이 담담했으나 그 담긴 의미가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진 나는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당신이 보이지 않아.. 세이지.... 당신이 거기 있어? " 세이지? " 정말 당신이 거기 있어? " ...................... 경서... " 방문을 지나쳐 나가는 한혁의 조용하고 어두운 발걸음소리 뒤로 울리는 그토록 듣고 싶었던 음성... " 세이지.... " 내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무엇일까... 반가움.... 기쁨.... 그것을 모두 덮어버릴만큼 ..... 두려움......... 그의 발걸음이 다가와 내 앞에 멈추었다. 다정하게 얼굴에 와닿는 세이지의 손길... 눈물로 젖어 있던 뺨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었다. " 늦게 와서 미안해..." 고요하고 평온한 목소리... " 세이지.... 차라리 화를 내...."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마... 당신이 상처 입는 거 정말 싫어... 당신은 내 은인... 내 형과 같은 사람.... 내 아빠와 같은 사람......... 내 할아버지와 같은 사람...... 당신이 좋은데.... 진심으로 좋은데..... " ............. 나는 너에게 화를 내지 않아...... " " 세이지.. " " 그럴수가 없어... " " ............ " " ................. 언제부터 나를 이렇게 지배하게 된거냐......... " 세이지의 목소리에 드러나는 안타까움... 슬픔.... 이런 것들을 당신에게 준 게 나야? " 미안해.. 세이지... 그렇지만 한혁의 잘못이 아냐.... 그의 잘못이 아냐.." " ........... " 아... 내 말이 지금 그에게 얼마나 더 큰 상처를 주고 있을까... 그러나 나는 나를 멈출수가 업다. 지금 흐르는 눈물은 한혁을 위해서 흘리는 게 아니야.. 오해하지마... 당신에게 상처주는 내가 너무 싫어서 흐르는 거야.. 당신의 마음이 아파하는게 너무 슬퍼서 흐르는 거야... " 그는 당신을 배신하지 않았어... 그를 오해하지 마.... 그는 당신의 친구야... " 계속되는 칼질들.. " ............... 네가 그를 사랑한다면 놔줘야겠지............ 그렇지만.......... " 그의 말끝이 두려워졌다. " ................... 그 전에 내가 죽을 것 같다............ " " 세이지...!! " " 숙부가 한 말을 이제야 이해하겠어........ 내가 여기서 담담하게 포기해야 하는 거겠지... 그래야 운명에 휘둘리지 않아......" " ............ " " 운명이란 것은 뻔히 앞을 보여줘.. 그러고도 뛰어들게 하는 거야..... 비극인줄 알면서도...." " ............ 세이지... 미안.. 미안..." " 울지마..... 내가 더 울리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나를 위해 울지마..... 평생 나를 미워하게 되도 울지마... " " 세이지? " 내가 어떻게 당신을 미워할 수 있다고.... " ........ 진심으로 사랑해.... " 그가 이마에 따뜻하게 입을 맞춰왔다. 입술이 떨어지면서 그가 조용히 몸을 일으켜 어디론가 발을 옮겼다. ' 스르릉-' 귓가에 들려오는 서늘한 소리.... " 세, 세이지? " "경서.... 이 칼은 조부가 자신의 형을 죽이고 그 자리에 앉을 때 그 심장을 찌른 칼이야... 조부는 그 일을 남에게 맡기지 않았어.... " " ....... 세이지... 그만둬..." " 조부가 그러더군.... 그 형을 진심으로 좋아했다고....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었다고... " " ....... 세이지.... 그만둬...!! 제발!! 용서해줘!! " " 너를 벌주려는게 아냐......이 일로 인해 벌을 받는 것은 나다......한혁도 너도 앞으로 다신 갖지 못하게 될테니..... " 멀어지는 세이지의 발소리가 마음이 도려지듯 깊은 아픔을 머금고 있었다. 안돼.. 안돼!! 어째서... 어째서..!! 결말을 뻔히 알면서도 ... 세이지.. 세이지... 세이지.... 다 내 잘못이야. 다 내 잘못이야.. 비극을 알면서도 뛰어든 건 그가 아니라 바로 나야... 내가 초래한 거야.. 내가 ....초래한 거야.... 눈물이 쉴새없이 흘렀지만 나는 그것을 느낄새도 없이 일어나 앞으로 뛰쳐나갔다.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문에 걸려 복도로 넘어졌지만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다시 일어나 벽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어디 있는거야... 세이지.. 한혁... " 정원입니다.... " 문득 귓가에 들려오는 또렷한 여자의 목소리.... " 당신은...... 그 때, 그 이케지마 겐자부로의 ............ 제발 말려주세요.... 한혁이 죽을지도 몰라요. " " 저는 단지 지켜보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 다급한 내 목소리와 달리 차갑고 침착한 음성.... " 흐흑..... 당신 주인은 이렇게 될 걸 다 알고 있었던 거야.. 그렇지....? " " ......... 결말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건 당신입니다... " 숨이 턱 막혀왔다... 그래...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그렇게 날을 세워 심장을 후벼파지 않아도 충분히 깨닫고 있어.. 비극을 예측하고도 욕망이 앞서 눈감아버리는 바보같은 게 바로 인간이잖아...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거니까 한번만 용서해주면 안돼? 응? 세이지...? 복도를 따라 정원으로 뛰듯이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에 대한 혐오와 눈앞에 펼쳐질지도 모르는 비극이 두려워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14. 여행이 끝나갈즘에. 정원에 발을 내려놓았을때 보이지는 않으나 강렬한 햇살이 온몸에 내리쬐는 걸 느꼈다.. 세이지... 제발 멈춰줘.. 초조한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고 있을때 어둠 속에서 무언가 반짝 거렸다. 실명하게 된 이후로 한번도 무엇을 본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저 빛은...... 칼날의 반짝임?!! 예리하게 빛나던 그 것은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한순간에 독하게 풍겨오는 진한 향내... 눈 앞 가득 퍼져가는 핏빛 .... 그리고 다시 어둠........ 나는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지금 내가 본것이 사실은 아니겠지? " ....... 경서....... 이미 늦었어............. " 아무 감정도 실려있지 않은 세이지의 목소리... 믿을수가 없었다.... " 한혁....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어...... 내가 자신을 벨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지마... 말하지마.... 그가 죽었다고 말하지마..... " 경서... 그가 죽었다... 내가 베었다... " 제발... 세이지.......... " 그를 확인하게 해줘..... 그를 만져보겠어.. " 내가 듣기에도 믿기지 않을만큼 냉정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네 바로 앞에 있다. 네가 내려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어... " 앞을 더듬었다. 손에 잡히는 한혁의 손... 가슴... 얼굴........ 바닥을 적셔오는 축축한 느낌의 그것........ "..... 향이 나질 않아..... 그의 향이 나질 않아....... " 얼굴은 이렇게 또렷한데.... 그의 가슴에 흐르는 것은.... " ... 내가 죽인 거야......... "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래.. 내 탓이다.. 내 탓이다.. 세이지를 이렇게 막다른 곳으로 몰고 간 것은 바로 나야.. 내가.. 내가... 결말을 알면서도.... 알면서도...! ' 다음에 또 보지.. 목련꽃이 만개하기 전에...' 한혁......... ' 당신들은... 이라고 말하지마. 너도 조선인이지 않아? 왜 조국의 미래에 대해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는거냐. 부끄럽지도 않은가? ' 한혁.........! ' 그래, 나를 믿고 안심해.' 한혁!!!!! 그렇게 나는 그를 죽였다..... 그의 죽음 뒤 며칠동안 난 어둠속에 웅크렸다. 나로 인해 그를 죽였다는 자책감이 밤, 낮을 가리지 않고 나를 괴롭혔다. 이런 것이 여행의 목적이라면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한혁을 죽이고 세이지를 상처주기 위해 내가 이곳에 왔단 말인가.... 도대체 왜 나는 이곳으로 보내진거야.. 결국 불행만 가져오는 사람에 불과하잖아.. 집에 돌아가고 싶어.... 어쩌면 여행의 의미 같은 건 아예 존재하지 않는지도 몰라... 겐자부로의 말대로 신은 단지 던져놓을 뿐 관여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여러 현상속에 내가 이곳에 왔을 뿐.. 어떤 의미같은건 없는거야.. 목적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어... 세이지는 그 이후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차라리 다행인지 몰랐다. 나는 그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위로받을 수도 없어....... 여행을 그만 끝내고 싶다........... 여름날 밤 풀벌레가 음을 짓는 평화로움 속에 나는 어두운 방안에 가지런히 누워 간절히 바랬다. 눈을 감고 떴을 때 집이었으면 좋겠어. 엄마가 아무일 없었다는 듯 웃어주고. 운이 좋다면 할아버지의 모습도 다시 보고.. 친구들도 다시 만나고... 재미없는 공부도 다시 하고.... 컴퓨터 게임도 밤새 하고........ 그네도 다시 타고.. 밤하늘의 별도 바라보고........ " 경서... " 조용한 공상을 깨며 내 이름이 불려졌다. " 세이지? " 확 풍겨오는 향긋한 술의 내음...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세이지의 몸이 내 가슴위로 쓰러져 왔다. " 세이지....." 가장 큰 벌을 받고 있는 건 그다... 그가 상처를 받는 것도 나의 잘못... 그가 사랑하는 친구에게 칼을 휘두르게 한 것도 나의 잘못.. 그의 보드라운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다. 그러나 손이 올려지질 않았다. 그가 이렇게도 안쓰러운데 손이 올려지질 않았다. 나는 마치 시체처럼 반듯이 누워있을 따름이었다. 세이지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감아왔다. " .... 아름다운 색깔이야... 네 눈동자만큼 어둡고 까매... 그런데도 별빛처럼 빛나고 부드러워... " " ............. " " 오늘 미국, 영국, 중국이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천황은 항복하지 않을거야... 내가 압력을 넣었거든.. " " ............ " " 다 망하게 되버릴거야... 네 나라를 짓밟은 나라는... 한혁이 원했던 대로 너의 나라를 자주독립시켜줄게... " " ............. " " 그래도 용서받지 못하겠지만 용서를 바라고 하는 건 아냐... 이것은 이케지마 세이지 식의 사랑이다.." " ............ 흐흑... " " 울지마... 부탁했잖아.. 평생 나를 미워하게 되도 울지 말아달라고.. 제발 그렇게 해줘.... 넌 눈물이 너무 많아... " " ............. 흑.. " " 사랑해.. " 술 내음이 그의 입술을 타고 나에게 흘러들었다. 혀가 조용히 얽혀 들면서 그가 내 머리를 두손으로 움켜쥐었다. 세이지의 뺨에서 눈물이 느껴졌지만 그것이 나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알수 없었다. 그의 울지말란 말에도 나는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감미롭게.. 감미롭게.. 계속해서 나를 사로잡는 세이지의 부드러운 입맞춤...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카락 사이에서 빠져나와 내 웃옷 사이로 파고 들었다. 가슴을 쓸어올리는 세이지의 손가락.. 허리를 감아올리는 그의 팔. 그의 입술이 내 목과 가슴으로 흘러내렸을때 나는 그만 고개를 뒤로 젖혀버렸다. 그리고 내 웃옷의 단추를 풀어버리고 얼굴을 파묻은 그의 머리를 자신도 모르게 감싸안았다. 나는 거부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가 원하면 나를 주겠다는 마음따위가 아니었다. '너도 그가 너를 믿는 만큼 그를 신뢰할 수 있어?' 마음 속에 들려오는 한혁의 목소리.... 그래........ 한혁............. 나는 그를 믿어... 그래서 그가 당신을 죽여도 나는 그를 미워할수가 없어.. 당신도 알고 있겠지... 당신도 그를 사랑하잖아........ 한혁... 당신 말이 맞아...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세이지에 대한 마음 또한 다른 방식의 사랑이야.... 그렇지만 이젠 그것을 말해줄 수 없어. 이미 당신을 선택했으니. 내가 그의 고개를 수그려 그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을때 세이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 세이지? " " 미안하다... 이럴 생각이 아니었어..." " ...... " " 널 잃을것을 알고도 시작한 일인데.... 이제와서 미련을 갖다니... " 그런게 아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 이것이 마지막이야... 경서.. 네 얼굴을 자세히 보게 해줘... " " ........... " 그의 두손이 얼굴을 따뜻하게 감싸왔다... 마지막이라니...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이마에 사뿐히 내려앉는 그의 입술..... 오래도록 떨어지질 않았다. " 너를 놓아줄게... " 침착한 목소리.... " ........... " " ............ 이런 여지를 남겨두는 것을 바라진 않아... 그렇지만.... " " ........ " " 만약에........ 네 스스로의 의지로 나에게 되돌아오고 싶다면 언제든지 돌아와...... " " .......... " " ....... 반드시 기다릴게.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너만 기다릴거야. " " 세이지........ 내가 너무 늦게 돌아오면? " " 네가 너무 늦어도 나에겐 되돌아왔단 사실만으로도 충분해... 마음보다 더 중요한 건 없으니까.. " " ... 바보같이... 다시 만나도 사랑따윈 못해. " 심장이 쪼개지는 듯한 슬픔에 울먹거렸다. 내가 무슨 염치로 당신을 사랑할 수가 있어? 이미 한혁을 사랑해버리고 당신을 배신하고 당신이 스스로의 손으로 친구를 죽이게 했어. 당신 심장의 깊은 상처는 내가 새긴거야.. " 그래도 기다릴 수 밖에 없어... 네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그건.. 그건 내 운명이니까.. " " ........... 운명같은 건..... 슬픈거야.. 그런 거 믿지마.." " 너에게 이런 부탁을 하게 되다니.... 정말 미안하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인지... " " .... 흐흑... 세이지... " " .......돌아와.. 경서..... 나를 용서할 수 있게 되면 반드시 나를 찾아... 꼭 기다릴게.... " 그가 나를 기다릴 거란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 당신에게 되돌아올 수가 없을거야. 그래도..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 잊혀질지도 모르니까... 한혁의 죽음이 남긴 당신의 상처도, 나의 상처도 아물지 모르니까....... 만약....을 남겨놓아도 .... 세이지가 몸을 일으켜 방에서 나가는 기척이 들렸다.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이 되지 않기를.... 15. 마지막 " 어떻습니까... " 대답을 재촉하는 질문 " 보여요... 흐릿하지만..." 나는 감격에 휩싸였다. 눈앞에 펼쳐지는 오묘한 색의 바다. 도대체 얼마만에 제대로 볼수 있게 되는 것일까. 이제 눈앞을 가리던 어둠은 걷혀가고 있었다. " 이식수술이 잘 된 것 같습니다. 한 열흘안으로 완전하게 보이게 될겁니다. " 의사의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나는 더욱 기뻤다. 그런데 의사옆에 조용히 서있는 한사람의 인영. 나는 눈을 찌푸려 상대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처음보는 여자... " 제 얼굴은 처음 보겠군요. 경서씨. 저는 이케지마 가에 있던 사람입니다. " " 아, 당신은. " 드디어 기억났다. 겐자부로의 냉정하기 짝이없던 충복. 아직 뚜렷이 보이지 않아 여자의 인상은 제대로 살필수 없었으나 단정히 차려입은 남색 치마정장이 보였다. " 마지막 일의 처리를 위해 제가 남았습니다. 여기에 이름을 써주십시오. " " 이게 뭐죠? 잘 안보여요. " 그녀가 내미는 종이들을 보다 나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물었다. " 경서씨 앞으로 된 일종의 재산증서입니다. 작은 주인님이 당신을 위해 마련한 것입니다. " " 세이지는 어디 있나요? " " 행방을 알리지 않고 사라지셨습니다. 무사하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에 가셨을지도 모르니. " " 일본에 무슨 일이 생겼나요? " " 우리나라가 항복요구를 묵살하자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습니다. 지금 소련까지도 우리를 상대로 전쟁에 참여한 상태입니다. " 그녀의 목소리는 침통하기보다는 건조한 느낌이었다. " ...... 아마 오늘쯤 항복하게 될겁니다. 아직 천황폐하는 결정 못하고 계시지만... " " 좀 있으면 조선이 해방되겠군요. " " 그렇습니다. " " .......... " " 저는 일이 끝났으니 가보겠습니다. 이제 눈이 보이실테니 자기 앞가림은 할 수 있을 겁니다. 서류안에 당신의 새집 주소가 적혀 있습니다... 저만 알고 있는 주소입니다." 당신은 알고.. 세이지는 모른다..... 멍하니 서류를 들고 있을때 나가려던 그녀가 문득 멈추어섰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녀는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 ..... 이런 말 해드려도 될지 모르겠군요. 작은 주인님께서 말하란 말도, 말하지 말라는 언급도 없으셨기에...." " ....... 무슨 말을? " " 당신의 눈 말입니다.... "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냉정한 눈초리... " 저는 도저히 이해할수가 없습니다만...... 그것이 그 분이 할 수 있는 사랑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 " 무슨 뜻인지.. " 이해가 안되어 바보같은 표정을 지었다. " 누구의 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 ........... 뭐라구요?! " 머리를 때리는 강렬한 충격에 서류를 떨어뜨렸다. 바닥에 흩어지는 종이들... " 정확하게 말해주세요.....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되묻는 내 목소리가 가련할정도로 떨려왔다. 불안한 예감이 맞지 않기를...!! "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미리 알고 있을 분은 당신이지 않습니까. " 얼음같은 목소리가 아름답기만 하던 색의 바다에 금을 낸 순간 문은 그녀의 모습과 함께 쾅하고 닫혀버렸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거야.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거야.. 세이지... 세이지.....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무슨 짓을 한거야.....!!!! ' .......돌아와.. 경서..... 나를 용서할 수 있게 되면 반드시 나를 찾아... 꼭 기다릴게.... ' 바보.. 바보.. 세이지......... 난 당신 얼굴도 알지 못해.... 당신이 날 알아봐야지..... 그런데... 왜 나에게 .. 왜 나에게....... ' 그는 모두의 머리 꼭대기에서 생각하는 사람이지 ' 세이지에 대한 한혁의 말이 생각났다. 모두의 머리 꼭대기에서 생각하는 사람... 당신...... 내가 되돌아가지 않을거라 생각한거야? 당신이 만약이라고 해놓고... 그 만약조차 믿지 않은거야? 그런거야? 바보같아.. 바보같아.. 당신은.. 정말... 운명따위는 슬픈거라고 믿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잖아.. 왜 내 말을 듣지 않는거야.. 왜 내 말을 듣지 않는거야.. 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나에게 눈을 준 그의 마음. 내가 돌아오는 기적을 바라면서도 나를 영원히 놓아주려는 그 마음.... 상처는 내가 냈는데 당신이 그 모든 것을 감당해내려고 하다니.. 그의 커다란 사랑을 왜 나는 받아들이지 못했지? 왜.. 나는 두 남자를 모두 사랑해버린거지... 둘다 불행하게 만들어버리고... 찾을거야.. 당신을 찾아내겠어. 찾아내서 바보라고 막 때려줄거야. 정말 있는힘껏 때려줄거야. 쉽게 잦아들지 않는 울음속에서 나는 결심했다. 그에게 돌아가겠다고. 그것이 바로 이 여행의 마지막이 될거라고. 그리고 얼마 후 8월 15일 원폭을 투하당하고도 내부의 압력에 의해 항복성명을 미뤄오고 있던 일본국왕은 그제야 항복을 수락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한혁이 그토록 바랬던 자주독립은 아니었지만 그 의미를 알건 모르건 이미 조선은 해방에의 기쁨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거리마다 울려퍼지는 환호의 외침과 나부끼는 태극기들. 사람들의 흥분된 물결. 그제야 조선은 능욕당하던 36년간의 침체기에서 빠져나와 광복에의 기쁨을 맛본 것이다. 시대의 뒷쪽에서 방관하고 있다고 한혁에게 나무람을 들은적도 있는 나이지만 역시 감격의 기쁨에 어쩔줄 몰랐다. 엄청난 사람들의 무리에 끼어들 생각은 감히 못했지만 그 아름답고 흥분된 물결을 보고 싶어 문가에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나라를 잃는다는 것... 굉장한 불행이었구나... 나로선 불과 일년도 안되는 동안이었다. 게다가 일본인에게 보살핌을 받는 처지였다. 내가 편히 지내는 동안 나의 민족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 있었다. 치유될 수 없는 그 아픔들을 묻어둔 채로 이제야 기쁨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빛내고 있었기에 그 깊이는 감히 내가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참을 그렇게 서있는데 사람들의 얼굴이 점점 흐려졌다. 왜 이러나 싶어 손등으로 두 눈을 문질렀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얼굴이 흐려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역시 흐려지는 모습들.. 잃어가는 색깔들... 당황한 나는 그만 발을 헛디뎌 사람들 속으로 몸이 섞여 들어갔다.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태극기를 휘날리고 있었지만 나는 그 태극기의 색깔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왜.. 보이지 않는거야.. 세이지의 눈이야.. 그가 자신을 희생해서 나에게 준 눈인데.. 어째서.... 더 큰 무리의 사람들이 합류하면서 몸을 함부로 놀릴 수 없을 정도가 됐을때 나는 갑자기 어느 한부분이 환하게 밝아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흐릿했던 것과는 다른 뚜렷함... 어슴프레한 풍경속에서 유독 선명하게 드러나는 그 곳...... 나는 벽쪽으로 붙어 균형을 유지하면서 그 곳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 곳의 중심에는 검은색 자동차가 있었다. 매끈하게 윤이나는 자동차 창문 사이로...... 저 사람은.................................................. ................................... 할아버지? 굉장히 젊었지만 그 사람은 분명 내 할아버지였다. 반듯한 이마 아래 짙은 두개의 눈썹... 그리고 지그시 감긴 눈.. 굳게 다문 입술의 선...... 늘 나에게 미소를 지어주던 바로 그것이다.. 할아버지가... 이곳에.... ?!! 왜.......... 내가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것이지? 그것이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것과 무슨 관련이........... 알수없는 의문에 빠진채 시선을 앞쪽으로 옮긴 순간 나는 커다란 충격에 휩쌓였다. 조수석에 앉은 저 여자.. 저 여자가 누군지 알고 있어..... 파란색 정장의 그 여자...... 나를 향해 냉정하게 나무라던 그 여자...... 그럼........ 할아버지가.... 할아버지가........ 흐릿하던 세상이 단번에 또렷해졌다. 마치 나에게 무엇인가를 깨우쳐 줬다는 듯이. " 세이지!!!!!!!" 울음섞인 목소리가 심장에서부터 솟구쳐 터져나왔다. " 세이지!!!!!!!! 세이지!!!!!!!!!! "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사람들의 함성에 묻혀버렸지만 난 악을 쓰며 불렀다. 세이지 !! 세이지 !! 당신이 내 할아버지였다니... 나를 그렇게 사랑해주고 내 전부가 되어 주었던 할아버지였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이미 나는 당신한테 있었는데!!!! 당신과 함께였는데!!!!! " 세이지 !!!!! 세이지 !!!!!!!! " 그의 이름을 부르며 나는 사람들의 흐름을 비스듬히 거슬러 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손을 뻗쳐 그를 불러도 그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차는 인파를 뚫고 이미 사람들이 빠져나간 한산한 골목으로 진입하려고 한다. 절망적인 마음에 빠져 달려가던 나는 문득 어떤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의 특별한 흐름.... 난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여행의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나는 되돌려지고 있었다. 안돼... 안돼.........!!!! 이런 식으로 끝나면 안돼....!! 그는 평생 기다릴거야.. 그래... 할아버지가 그토록 끈질기게 삶에 집착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린 거야. 간절하게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어. 그에게 그런 희망없는 기다림을 줄 수 없어. 제발!! 신이여!!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그에게 되돌아갈 수 있는 시간을 주세요 !!! " 세이지!!!!!!!!!!!!!!!!!!!!!!!!!!!!!!!!!!!!!!!!!!!!!!!!!!!!!!!!!!!!!!! " 차가 골목으로 들어가 그 끝자락도 볼 수 없게 됐을 때 나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온 영혼의 힘을 다해 그를 불렀다. 터져나온 눈물은 쉴새없이 흘러나와 앞을 뿌옇게 가렸다. " 세이지!! 세이지!! 흑흑... 세이지.. 이대로 가면 안돼..." 손등을 들어 눈물을 닦았을 때 나의 눈동자는 커다래졌다. 골목 안쪽에서부터 서서히 나타나는 그림자. 그가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있는 힘껏 사람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골목 앞에서 그가 가만히 벽에 기대어 서서 무엇인가에 유심히 귀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놀란 듯 고개를 드는 그의 품안으로 나는 정신없이 뛰어들었다. " 세이지!! 세이지!! " " 경서!! " " 세이지.. 그냥 가는 줄 알았어." 그의 품에 안겨 눈물을 터뜨리자 세이지가 나를 안은 두 팔로 내 머리를 더듬었다. " 정말 경서야? 나를 찾은거야? 네 목소리가 들렸어. " " 바보같이 왜 나에게 눈을 줬어?! 당신 얼굴도 모르는데 어떻게 당신을 찾으라고!! " " ... 이렇게 찾았잖아..." 내가 막 화를 내도 그는 빙그레 웃었다. " 세이지... 나 가야 돼.. 나 돌아오지 못할거야.. 나 기다리지 마.. 기다려선 안돼 알았지? " " 무슨 소리야..... 지금 돌아왔는데 어딜 가겠다는 거야.." 그의 당황한 목소리에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거야.. 나도 어쩔수가 없어.. 세이지 나 못돌아와.. 나 기다리지 마.... " " 보내지 않을거야.. 네가 날 찾은 이상 보내지 않을거다.. " 나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지만 난 그가 결코 보지 못할 고개짓을 했다. 점점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특별한 기운 속에 나는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 " 잊지마.. 세이지.. 내가 내 의지로 돌아온 거야... 비록 다시 가지만.. " " 경서!! " 그도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불안한 표정이 서렸다. " 세이지.. 사랑해.."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입맞추는 순간 발밑에서부터 회오리가 생겨나면서 나를 세이지에서 앗아가버렸다. 16. 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 쿨럭!! " " 경서야 !! " " 애가 깨어났어요!! " 거친 숨을 내뱉었을때 쉽사리 눈이 떠지지 않았다. 소란스러운 주위의 분주함. " 경서야.. 경서야.. 눈떠봐라.. 우리 경서.. 흐흑... " 엄마의 울음섞인 목소리에 나는 힘들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 눈을 떴어요!!! 경서야.. 경서야.. 흐흑... " " 여보.. 애가 놀라겠어. 그만 울어. " 나를 둘러싼 부모님의 모습 내 눈꺼풀을 뒤집고 검사해보는 의사와 간호사... 완전히 의식을 회복한 것 같다는 의사의 말에 엄마,아빠의 안도하는 표정이 보였다. " 엄마...." " 경서야...!! " " ... 어떻게 된거에요...." " 네가 할아버지 돌아가신 날 놀이터에 쓰러진 것을 경비원 아저씨가 발견해서 병원까지 실려온거야. " " 얼마나 이러고 있었죠. " " 한달 가까이 의식을 잃고 있었어." 한달...? 한달이래도. 일년이래도 이상할게 없어.......... 놀이터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꽤 오래 전의 기억이다. 그러나 나를 안고 있던 세이지의 팔의 촉감은... 너무나도 생생해.. 세이지는 한순간에 나를 놓치고 말았겠지. 그를.... 남겨놓고 와버렸어....... " 아흑..." " 경서야 !왜 우니? " " 흑흑...... 엄마.. " " 그래.. 무슨 일이야.." " 할아버지는? " " 원래 인척이 없이 홀로 되신 분이라 화장해드렸다... " " 아빠.. " " 왜 그러니? " " 할아버지는 일본 사람인가요? " " 아니.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니? " 놀라움이 역력하게 아빠의 얼굴에 드러났다. " 나도 전혀 모르고 있었단다. 그런데 상중에 일본에서 사람들이 문상을 오지 않았겠니? 전혀 연락하고 있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마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와서 당황했단다. " " 굉장한 집안이더구나. 품위있고 고급스러워보이는 사람들이었어. 그 사람들 말로는 할아버지가 해방후에 한국인으로 신분을 바꿔 살았다고 하더구나." " 집안과는 일체 연락을 끊고 사신 모양인데 왜 그러셨는진 모르겠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니? "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기다리지 말랬는데 바보같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나를 기다리다니.. 당신은 정말 바보야.. " 할아버지는 어떤 사람과 결혼했죠? 할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 " ..... 깨어나더니 왜 자꾸 그런 걸 묻는 거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충격이 아직 가시질 않은 모양이구나. 우선은 쉬렴... 갑자기 말을 많이 하면 좋지 않아.." 엄마가 당황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 한달동안 쉬고 있었잖아요.... 아버지 대답해주세요.. " " 경서야.." 엄마의 나무라는 표정에 아버지가 고개를 흔들었다. " 무엇이 부끄러운 이야기라고 그걸 숨기오? 아버지가 완벽한 가정을 원하셨기에 모른 척 살았을 뿐.. 말해도 상관없어요. " " 무슨 말씀이세요? " " 너희 할아버지는 결혼하신 적이 없으시다. 한국 전쟁후에 나를 양자로 들이신 거란다. 그땐 나같은 고아가 많이 생겨났거든.. " " ....!!" 눈물이 쏟아졌다. 인연의 끈이 매정하도록 슬프고 기구하다. 세이지.. 당신이 그토록 기다린 사람이 결국 당신으로부터 생겨난 거에요. 당신이 아버지를 거둬들이고 길러서 결혼시키고 그래서 태어난 내가... 내가 다시 당신을 만나고... 별이 돌아오기를 당신은 그렇게도 기다렸는데... 이미 별은 돌아와있었어.... 그러나 깨닫지 못하면 아무것도 소용없는거야.. 아무것도 소용없어... 단지 추억만 남을 뿐....... ' 운명이란 말이다. 떠나는 별과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별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는 힘과도 같은 것이란다. 그렇지만 멀리서 스치기만 할 뿐 닿지는 않아. 닿아서도 안되고. 그래서 더 안타깝고 슬픈게 운명이야. ' 세이지........... 나는 곧 퇴원했다. 집에 돌아와 엄마, 아빠와 함께 같이 이야기를 하고 식사를 하고 텔레비젼 프로를 보고 학교에 나가 친구들을 만나고 ..... 되풀이되는 일상적인 생활들... 그토록 간절히 되돌아오기를 바랬건만 그 대가가 너무 크고 아팠다. 그리하여 시간은 예전과 다름없이 흘렀지만 나는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두 개의 사랑을 하고 떠나보내고... 내 곁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비참한 결말을 나에게 준 이유가 뭔지... 신은 정말 방관만 하는 것인지... 아님 오히려 악의적인 구석이 있는건지..... 인간에게 시련을 던져주고 극복과 실패를 즐기며 바라보는지.... 그런게 신이라면 겐자부로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우리는 그냥 내던져진채 살아가고 .. 우리의 행복과 기쁨은 무시되어도 괜찮다고.... 그러나 감정은 살아 있어서... 이 마음은 어쩔 수가 없어서... 보고 싶어.. 세이지.... 보고 싶어 .. 한혁... 길을 무작정 걸으면서 여행의 추억과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다시 돌이켰다. 마음은 아프지만 절대 잊혀질 수 없는 것들이니까. 그리고 문득 멈춰서 고개를 들었을때 나는 어느 화랑 앞에 있었다. ' 빛과 사랑 - 최윤하 작품 전시회 ' 또박또박 읽어본 플랜카드의 글자들은 웬지 마음을 이끌었다. 빛과 사랑이라... 한때 내게 빛을 간절할 때가 있었지. 그러나 나에게 빛이 되준 사람들이 있었어. 전시회장을 들어서서 팜플렛을 하나 주워들고 초입부터 찬찬히 그림들을 살폈다. 빛깔이 오묘하게 섞인 아름다운 그림들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한 점. 한 점.. 그림에 무지한 내가 매혹될 만큼 화려하고 눈이부셨다. 어떤 물감을 써야 저런 색을 낼 수 있는거지? 나도 모르게 그림에 다가가 손으로 만졌다. " 만지시면 안됩니다 " 정중하게 울리는 화랑점원의 목소리에 흠칫하며 물러섰다. 그 때 누군가의 음성이 귓가에 들렸다. " 저 실례합니다. " 이 목소리는!! 깜짝 놀라 뒤돌아 보았을때 키가 크고 짙은 눈매가 인상적인 젊은 남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 한혁? " " 네? " 나는 스스로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그의 이름을 부르다니...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잖아. " 착각했습니다. 아는 사람과 목소리가 비슷해서.." 씁쓸하게 말했을때 그가 활짝 미소지었다. " 굉장한 우연이군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 " 네? " " 아까 들어오실때부터 계속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 " .... 무슨 일로... " " 제가 알고 있는.. 아니 알고 있는 것도 아니지요. 어쨌든 제가 아는 사람과 많이 닮으셨거든요. " " 그런가요? " 한혁의 목소리로 웃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렸다. 얼른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에 대충 대답하며 고개를 다시 그림으로 돌렸다. " 그 분을 당신에게도 보여드리고 싶어요. " 내가 그만 대화를 끝내고 싶은 기색이 완연한데도 그는 끈질기게 말을 붙여왔다. 나는 약간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 사람을 어떻게 나한테 보여준다는 건가. " 어떤 분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닮은 정도이겠지요. 저는 그만 작품을 보고 싶습니다만.." " 알고 계십니까? 그걸 그린 사람이 바로 저랍니다. " 놀라서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싱글벙글 웃는 폼이 거짓말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들고 있던 팜플렛을 열어 화가의 사진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 정말이군요.... 최윤하씨? " " 네. 제가 최윤하입니다. " " 굉장히 젊으신 분이군요. 사진은 나이들어보이게 나왔는데.. " " 일부러 그렇게 찍은 거에요." 그가 씩 하고 웃어보였다. 굉장히 잘생긴 사람이구나.. " 그림들이 너무 아름다워요. 이런 색깔들은 어떻게 나올 수가 있는건가요? " " 떠오른 영감에 가장 근접하게 그릴때까지 수백번이라도 다시 그리면 됩니다. 결국 백가지의 영감에 열가지의 그림도 나오지 못하지만요. " " 정말 훌륭해요. 눈부셔요." " 그렇게 극찬하시지 않아도 된답니다. 사실 저는 그분으로부터 빛깔에 대한 영감을 받았거든요" " 그분이라뇨? 아까 저를 닮았다고 하신 분? " " 그래요. 그래서 한번 보여드릴까 하는데 같이 가시겠어요? 자랑은 아니지만 사실 이 화랑이 저의 집안 것이라 제 개인 작업실이 있습니다. " " 개인 작업실이라니.. 무슨 뜻이죠? 그 분이 거기 계세요? " " 사실 그 분은 사람이 아니라 그림 속 주인공이랍니다. 그래서 보여드리겠단 거에요. " 그가 자꾸 만남을 재촉하면 정중히 거절하고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던 중에 사람이 아니라 그림 속 인물이란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순간 내 머릿속을 울리는 어떠한 예감.. ' 관계자 외 출입금지' 라는 팻말이 조심스럽게 붙은 문을 거침없이 열고 들어가는 그를 따라 발을 안으로 내딛었을때 나는 문득 멈춰서고 말았다. 넓다란 공간 안에 가득 널린 그림들과 미술도구들.. 여기저기 세워진 이젤들.. 천장의 커다란 창을 통해 햇살이 가득 펼쳐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마주보이는 벽면에 환히 빛나고 있는 여러개의 스케치들... " .......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이죠? " 마법에 홀린 듯 서서히 그림 앞으로 걸음을 옮기는 내 옆에서 그가 감탄하는 어조로 말했다. " 이것은 돌아가신 제 친척중의 한분이 생전에 그리신 거랍니다. 도쿄대 경제학부에 다닐만큼 굉장한 수재셨다는군요. 그런데 그림에는 더 큰 재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혁.... 나도 모르게 눈물이 또르륵 구르기 시작했다. " 어렸을 적에 종가(宗家)에 갔다가 발견한 거랍니다. 요절하신 분의 유품이었지만 그림에 한눈에 매료된 제가 달라고 하도 떼를 써서 가질 수 있었지요." " ................ " " 이 그림들이 오늘날의 저를 있게 해준거랍니다. 보세요.. 그림 속의 주인공은 오직 한 사람... 당신을 닮지 않았습니까? " " ................ " 아니.. 닮지 않았다.. 하나도 닮지 않았어... 나는 이렇게까지 아름답지 않아.. 나는 이렇게까지 환하게 빛나지 않아. 아름다운건. 환하게 빛나고 있는 건. 한혁, 당신의 마음... 나를 그리고 있었을 그 순간의 당신의 마음... " ............ 울고 있는 겁니까? 지금? " 한혁이 나를 이렇게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지 몰랐다. 저리도 표정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나를 그렇게도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던 거야? 미소짓고 있는 나. 정원에서 물을 주며 즐거워하는 나. 생각에 잠긴 나. 머리를 쓸어넘기고 있는 나. 잠들어버린 나의 모습까지...... " 저는 이 그림을 그리신 분이 그림의 주인공을 몹시도 사랑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무리 오묘한 색을 내도 단지 스케치뿐인 이 그림들의 빛을 따라가지 못하거든요." " ............ " " 너무나 아름다운 소년이지 않습니까... 당신을 지나치게 닮았어요 ........ " " .......... "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로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 저에게 그림을 하나 주실 수 없으세요? " 간절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잠시동안 침묵했다. " .......... 부탁드립니다.. " 어려운 일일 거란 생각에 다시 한번 말을 꺼냈다. " 저는 가끔 이 소년이 실제 인물로 느껴질 때가 있어요. 실제로 본적도 없는데 때때로 가슴이 저밀듯이 그리움이란 것이 밀려든단 말입니다. " " .............. " " 종가에서 그리신 분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저와 굉장히 많이 닮았더군요.. 그래서 그런지 그림에 더욱 끌렸는지도 모릅니다. " 말하는 그의 눈빛이 말할 수 없이 그윽했다. 마치 한혁이 말하고 있는 것 같아.... " 당신에게 그림을 드리겠습니다. 하나가 아니라 모두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 ... ?" " 여기엔 모두 열개의 그림이 있습니다. 저와 만남을 한번 가질 때마다 한개씩 드리겠습니다." " 그 말씀은.... " " 연락처를 남겨주십시오.. 오늘 이후로 저와 아홉번의 만남을 갖는 겁니다. " 그는 가장 처음에 있는 액자를 떼네어 내 앞에 들어보였다. "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 이 사람은 한혁과 너무 많이 닮아 있다. 그것은 내게 상처가 될지도 몰라..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는 것은 아직은 두렵다. 그렇지만 그것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한혁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라면... 이 인연은 과거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 곧이어 그림이 내 손에 올려졌다. 마루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나.... 그 옆에서 당신은 나를 그리고 있었군요.... 즐겁고 평화로왔던 순간들이 기억되면서 가슴이 싸아하게 아파왔다. 눈물이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리자 윤하가 손을 들어 내 뺨을 매만졌다. " 눈물이 많은 분이군요.. 아니면 그 그림들이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추억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 어두운 빛깔로 채색되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나는 미소지었다. " .................. 네... 여행의 추억이죠.... " 소중하게 기억 될 별의 추억...... 내 두개의 사랑과 잊혀질 수 없는 사람에 관한. - 어떤 별들은 평생을 자기 자리를 지키고만 살지, 그렇지만 어떤 별들은 여행을 떠났다가 정해진 시간 후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단다. 그것이 그 별의 정해진 길이지